우리는 대부분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학교에서 교과과정으로 배울때에 "이슬람국가의 기독교 성지 순례의 방해로 인한 기독
교의 원정 전쟁." 이정도로 배웠을 것이다. 아마 담당 교사에 따라 좀더 상세하게 배웠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
부분 십자군 전쟁에 대한 관점이 서양 기독교의 관점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교과과정에 있는 부분들이 사실
이 아닌건 아니지만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역사적 사실로써의 십
자군 전쟁의 개요를 살표보겠습니다.
십자군 전쟁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의 요청을 받아들여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 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
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며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
1096년 처음으로 군중십자군이 결성되어 은자 피에르를 중심으로 동방으로 진격.
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 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있어 십자군의 공략에 대
응하지 못하고 니케아를 점령당함. 그후 수년간의 전쟁 끝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 성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
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를 함. 중동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짐.
그후 2차 십자군 원정 (1147~1148) 십자군 패함.
3차 원정(1189~1194)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만에 이슬람측이 예루살렘을 점령. 이소식을 듣고 그레고리오 8세가 예루살렘
재탈환을 호소하고 3차 십자군이조직. 십자군 원정중에 가장 유명하게 됨(사자왕 리처드 때문에...) 예루살렘 재탈환은 실
패하고 휴전조건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음.
4차 원정(1202~1204)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함. 하지만 십자군을 수송할 도항비가 부족하여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의 전쟁이 발생. 하는 수없이 다시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을 요청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음.(결과적으로 팀
킬)
알비 십자군(1208)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짐.
ㅁ제6차 십자군 원정 (1228~1229) 프리드리히 2세의 주도로 이루어짐. 전쟁보다는 외교수단으로 영토를 양보받았지만 그가
돌아간뒤 병사들사이에 내분으로 예루살렘을 잃음.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1249)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주도. 이집트 다미에타를 점령. 이슬람측이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했으나 거부. 카이로를 향해 진군하다 패함.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역시 루이 9세가 재차 출병.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함. 튀니스를 공격하고 튀니스에서
사망.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
했다.
[출처] 위기백과 십자군 부분,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십자군 부분,
블로그 달빛산책님의 http://blog.daum.net/brightmoonlight/124 페이지 참고
여기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자하는 부분은 "십자군 원정이 발생하게된 계기는 무엇인가." 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후기로
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어지고 영주들의 욕심에 의해서 진행되어 실패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점자 르네상스에
돌입하게된다는 부분은 다들 아실텐데요. 그럼 그러한 "실패한 전쟁의 명목은 질실되고 떳떳한 이유였느냐."가 궁금증에 남
습니다. 실패한 전쟁이라도 전쟁의 명분이 확실하고 옳다면, 그 전쟁이 비난 받을 명분이 하나라도 사라지겠지요.
우선 기독교(로마 가톨릭)측에서 명분으로 삼은건 "성지순례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고 침략하였으면 그에 대하여 알렉시오
스 1세의 구원 요청으로 인한 교황의 자위권 행사 내지는 원정 선포" 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정당한 명분이었을까요?
그때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서유럽에서는 카노사의 굴욕(1077년)으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최고조를 달하고 있을 때였습
니다.
동유럽은 이슬람 세력의 셀주크 트루크가 비잔틴제국 까지 진출하고 시리아,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콘스탄티노플
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1081년 제위한 알렉시이오스 1세는 노르만족을 격퇴시키고 셀주크 투르크와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
다. 그 도중 셀주크 트루크의 3대 술탄 말리크가 죽은 이후(1092년) 아들들의 내전이 일어났고 이러한 상황에서 알렉시이오
스 1세는 셀주크 트루크의 세력을 꺽을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지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안전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이유에서 알렉시이오스1세는 교황의 힘을 빌리기로하고 피아첸차 회의(1095년 3월)에서 피해를
과장되게 보고해 원조요청을 하게 된것이지요.
처음부터 종교적인 성스러운 목적으로 성지탈환을 주장한게 아니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라는 기록은 서
유럽 측의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딸인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인 《알렉시아드》와
서유럽 측 역사가들의 기록이 많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평화정책을 견지하고 있
었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 세계는 내분이 일어나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일부 해적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를 박해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십자군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출처] 위키 백과 십자군 - 원인 및 배경 부분.(위키의 출처는 십자군이야기 김태권저 길찾기 2003년)
- 김태권씨의 십자군 이야기 그림책형태로 되어있어서 읽기도 좋고 매우 유익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홍보 아님.
그러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지탈환은 과연 정당한 이유였을까요?
그 시대에 중동(이것도 서양의 세계관이라 단어가 찝찝한 감이있음)상황에 대해서 조금더 알아 볼까요?
아 그러기전에 우선 "기독교외의 타 종교는 기독교의 성지순례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는가?" 라는 질문부터 하고 넘어가야
겠네요. 특히 기독교의 공통 성지를 가진 유대교,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겠지요.
같은 성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타 종교가 과연 성지순례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을까요?
당연히 성지순례를 받아들일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받아들여 줄수도 있지요.
예루살렘이 아랍인 이슬람의 영토에 놓인건 638년이지만 이슬람영토였을 때에도 성지순례에 대해서 허용하고 관용적이었지
요. 그후에 11세기 초바의 파티마 왕조에 들어서면서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동방(서양인들의 시각)에서의
기독교의 권위가 낮아졌고 셀주크왕조가 들어서면서 기독교의 성지순례가 어렵게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7세기부터 이루어지던 성지순례의 이슬람에 관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성지순례가 어렵게
되자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빌미로 십자군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럼 과연 이러한 행위가 정당한 행위 일까요?
배려가 지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말처럼 기독교의 성지순례를 받아주자 기독교는 그행위를 당연시 여기고 관용을 배푸는걸
멈추자 이슬람국가에대한 도전을 하는게 정당한 행위일까요?
그리고 과연 이슬람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의 성시순례를 박해한걸까요? 실제로 순례자들을 약탈하고 살해한 주된 세력은 해
적이나 강도등의 세력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정권이나 교권에 의한 박해가 아니었지요.(파티마왕조에서는 왕권의 명령
아래에서 박해를 했지만 파티마 왕조가 박해가 심하던시기에는 오히려 파티마왕조에대한 침략이 없었다. 그렇다고 파티마
왕조의 박해가 정당하다는건 아닙니다.)
그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왜 성지탈환을 빌미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 걸까요?
로마 카톨릭 교회는 11말에 서유럽에서 가장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유럽에서 대적 할만한 세력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 뿐이었죠. 그당시 기독교는 동방 정교회와 카톨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세력은 내분으로
인하여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죠. 이러한 문제들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중에 하나가 십자군전쟁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책을 답습한 우르비아누스 2세의 성지 십자군 운동에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
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지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
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군국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번째
동기는 교황의 최대의 적인 동일황제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 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
인일은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
럽의 영적 지도자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셋째로 우르
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출처]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pago1217/4478348
(이분도 어느 논문이나 책에 출처가 있을거 같은데 출처 표시를 하지 않았군요...)
결론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의 정말 순수한 기독교인 박해를 막기위한 목적으로 십자군이 발발한게 아니었습니다.
조금더 교황권의 강화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초기 십자군의 행위가 과연 정당한 행위들 이었나." 를 알아보겠습니다.
십자군은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키스타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
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라네요. 기본적으로 전도또는 개종을 시키기
위해서 침략을 하는 군대. 라는 의미 인거 같네요.
로마 카톨릭 교황이 십자군소집을 위한 연설을 할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예수가 태어나서 자라 세례를 받고
십자가가 사역을 이룬 거룩한 땅에 가서 선행을 행할것을 역설했다. 그는 거룩한 땅이 지금 이방의 모독자들에 의해 모독
받고 있음과 기독교 순례자들이 최악의 취급을 받고 있음을 열정적으로 고발했다. 그렇게 되자 군중들은 분노로써 들끓게
되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군중들을 향해 성지로 가서 더러운 터키 이슬람고됴들의 손에서 그리스도의 무덤과 예루살
렘을 구출하도록 호소하였다. ... 중략 ...
그당시 로마제국의 군대는 황제의 소유였기에 교황은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십자군 동원(모집)령을 내려
군인을 모집했다. 십자군을 정식으로 선포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많은 군인을 모집하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이
죽으면 즉각적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자원 했다.
... 중략 ... 한편, 민심을 심자군으로 크게 기울게 한 중심에는 은수자 피에르가 있었다.
[출처] 국회도서관 논문명/ 저자명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재조명 / 송양현 발행: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자료실
:석박사 학위논문실(107호)
"전쟁에 참가하여 죽으면 천국을 간다."라는게 과연 기독교적 사고인가요?
또한 전쟁에 처음 참가하게된 민중 십자군은
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
세가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하러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
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
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
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간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
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난
다.[3]
[출처]위키백과 군중십자군 부분
더 자세한 부분은 찾아 보면 나오겠지만 군중 십자군의 행위는 전혀 도덕,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행동들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기독교적 행동인가요? 초기 십자군의 행위도 정당하지 않았지요.
이글을 쓴 계기는 지니엘님이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박해로인한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이었다." 라는 발언때문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독교의 땅이었고 이슬람 세력이 침략하였으니 다시 되찾는것만으로도 명분이 충분하다." 라고 하셨는데 원
래 그냥 중동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시대에도 중동 사람들이 살고있었고요. 왜 서유럽에서 침략을 하는겁니까? 기
독교의 원래 땅을 되찾는다면 전도를 행했어야 했겠지요. 침략 전쟁이 아니라.
지니엘님이 예로 일본이 서울을 침략했는데 서울 안찾을꺼냐고 하셨는데 예로 들어 주신게 많이 빗나가 보입니다.
물론 찾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원래 우리가 살던 영토 입니다.사람이 살고있었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신념이 지배하고 있기
보다. 그런 의미로 따지자면 고조선이 있던 땅을 우리가 되돌려달라고해도 타당한거고, 미국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땅을
되돌려 주어야하겠지요.
3줄로 요약 정리하자면
1. 십자군 전쟁은 순수하게 기독교박해, 성지탈환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2. 십자군 전쟁은 로마 카톨릭 교황의 교권 강화의 야욕이 있었다.
3. 십자군의 행동도 정당하지 못하였다.
쓰는 도중에 내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가치나 가치관, 도덕적 윤리적 신념, 개인의 가치, 자아의 발견, 같은걸 공부해서 강사가 되고싶은 마음은 조금 있으나 왜 이시간을 이렇게 소비해가면서 이러고 앉아있나... 백수주제에... 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참 이글을 쓰면서 참고했던 자료 또는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8B%AD%EC%9E%90%EA%B5%B0
-위키백과 십자군 부분.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00&docId=630156&mobile&categoryId=1128
-종교대학사전 - 한국 사전 연구사.
http://naver.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DMT1200826505&sysid=nhn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재조명 / 송양현
http://blog.daum.net/brightmoonlight/124
-블로그 - 달빛 산책 십자군 전쟁
http://blog.daum.net/tjftnsdl/673411
-블로그 - 십자군 전쟁의 원인,경과,영향 및 의의
그리고 책읽는걸 별로 안좋아해서 참고하진 않았지만 많은 도움이 될만한 책들
십자군 이야기 - 김태권
차하순,『새로 쓴 서양사 총론Ⅰ』, 탐구당, 2000,
유럽문화사 上 - 페이터 리트베르헨 지음 (5장 지중해 주변의 세 세계 : 서부 및 동부 기독교 왕국과 이슬람 197~216)
서양중세문명, 문학과지성사, 쟈크르고프, 1997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지음
신의 전사들 - 제임스 레스턴
그리고 이건 교보 E북에서 무료로 볼수있는 책이에요.
http://digital.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Detail.ink?selectedLargeCategory=001&barcode=4809050100762
십자군 이야기 1&2 고전 읽기 - 김태권 교보 e 북 (십자군이야기는아니고 정의나 개인적인 신념에관한 좋은 도서가 될꺼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