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bringcolortomyskin.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5P0WcqGpDMU
김지하, 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넉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까지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정호승, 사랑에게
나의 눈물에는 왜 독이 들어 있는가
봄이 오면 봄비가 고여 있고
겨울이 오면 눈 녹은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줄 알았더니
왜 나의 눈물에는 푸른 독이 들어 있는가
마음에 품는 것마다
다 독이 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사랑이여
나는 이제 나의 눈물에 독이 없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의 눈물이
당신의 눈물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독극물이 든 검은 가방을 들고
가로등 불빛에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더이상 당신 집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만 가던 독을 버리는 일
버리고 나서 또 버리는 일
눈물을 흘리며
해독의 시간을 맞이하는 일
서정춘,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장시하, 별을 따러 간 남자
세상에 온통 사랑이 가득한 날
나 사랑의 노를 저어 저 하늘 별 하나
따러 하늘로 올라 가리라
나 그 별에 유칼립투스 나무 곱게 심고
그 별 이름 유칼립투스 별이라 하겠다
유칼립투스 나무 아름드리 자라나면
나 그 별에 사랑집 한 채 예쁘게 짓겠다
그 집 앞에 작은 우체통 하나 만들어
나 사랑의 시를 적어
당신이 사는 나라에 부치겠다
나 유칼립나무 다듬어 천상의 악기를 만들어
밤이 되면 당신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겠다
비가 내리는 밤, 당신의 가슴에
고운 별비로 내리고
눈이 내리는 날, 당신의 가슴에
하얀 눈꽃으로 피어 나리라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 가득히
그 별 가득 꽃으로 피어 나리라
천상의 화원을 거닐며
사랑의 시를 쓰리라
나 사랑에 댓가를 원치않으리라
당신이 행복겨워 하는
모습 환히 비추우며
나 천년을 하루같이
유칼립투스 별 우체통에
사랑의 시를 적어
당신께로 보내겠다
당신의 고운 가슴에
나 별 하나 따서 바치겠다
이영춘,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헤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갈등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육중한 시간에 눌려
실타래 풀어 가듯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다
수틀에 수(繡)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 가는 일이다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끼를 닦아 내고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거기서 한 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
이것이 인생의 주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주제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