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deeprest.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EDe7RpsGvuE
강연호, 나도 왕년에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엔 사내들 몇이서 밥 대신 소주 들이켜며
저마다의 왕년을 안주 삼고 있었습니다
나도 왕년에는 소주에 밥 말아먹던 시절 있었나요
사내들의 뒷덜미를 움켜쥔 그림자 흔들리고
불빛에 베인 눈시울은 붉다 못해 황량했습니다
쓰디쓴 왕년을 입 안에 털어넣으며
사내들은 헐거운 삶을 더욱 풀어놓았구요
내 늦은 저녁도 소주처럼 쓰고 차가웠습니다
쓰디쓴 밥알들을 입 안에 털어넣고
왕년인 듯 오래오래 씹고 또 씹었습니다
덧난 눈시울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우대식, 오리(五里)
오리(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이홍섭, 두고 온 소반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정끝별, 물을 뜨는 손
물만 보면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 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 나가는 것이라고
무연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본 적 언제였던가
정양, 첫눈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