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형(58)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전복(顚覆)적 시장주의자’쯤 되지 않을까. 그와 4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든 생각이다. 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장경제가 작동된 적이 없는 만큼 시장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전복적’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는 부딪칠 필요가 있다면 누구와도 그럴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지난해 12월6일 열린 청문회에서는 재벌 총수들 바로 뒷자리에서 “재벌들은 조직폭력배들과 똑같다”고 발언해 청문회장을 뒤집어놨다. 한화투자증권 대표로 있던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라는 그룹 지시에 반기를 들다 수난을 당했다.
주진형은 분류하자면 진보에 가깝지만 진보진영 내 ‘수구적인 행태’에는 날을 세운다. 20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공약 작성에 참여했지만, 이 당에 대해서도 까칠하다. 그래서 주진형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사회에선 설 자리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공간이 넓어져야 사회가 바뀔 수 있고, 지금이 그 시기일지 모른다.
지난 12월27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주진형은 한국 경제와 사회를 ‘죽는 쪽으로 진화해 가는 갈라파고스 생물들’에 비유했다.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데는 경제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사법개혁이 더 효과적이라고 봤다. 미국 기업 엔론의 최고경영자(CEO)가 분식회계로 징역 24년을 선고받은 것처럼 “법을 안 지키면 아주 큰 처벌을 받는 원칙만 제대로 서도 한국 사회가 엄청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유리병에 넣은 주먹 못 빼는’ 재벌들
- 지난해 재벌 청문회는 재벌 문제의 핵심을 학습하는 계기가 됐다. 총수들의 답변 태도를 보면 심지어 영리하지도 않은 것 같다.
“한 의원이 ‘좋은 경영자란 뭔가’라고 질문했는데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은 답변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 평소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보였다.”
- 삼성 사태를 보면 국민경제는 어떻게 되든 세습만 온전히 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거 말고도 문제가 많다. 우선 경제력이 집중되다 보면 재벌들이 개혁을 방해한다. 그럼 경제가 왜곡된다. 더 심각한 건 총수가 그 많은 사업들을 잘 알려 해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잘 모르니 경영진도 제대로 뽑을 수 없고, 경영 평가도 불가능하다. 결국 가신에게 의존하게 되지만 그들은 계열사 고위직으로 내려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계열사 사장을 흠집 내려 한다. ‘얘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갈게요’ 식으로. 그러다 보니 30대 재벌 기업 사장 평균 재임기간이 2.5년에 불과하다. 총수체제는 성과 관리도 안되고 사람을 키우지도 못한다. 그게 다 국민경제에 부담으로 돌아온다.”
- 이건희 회장 때는 달랐나.
“이 회장이 삼성전자는 잘 알았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CEO들은 비교적 오래갔다. 반면 다른 업종 사장들은 자꾸 갈렸다. 회장 본인이 잘 모르니 측근들이 ‘쟤 아닌 거 같다’면 바꾸는 거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생명 사장에 금융업 문외한인 그룹 감사팀장을 내려보낸 일이다. 요컨대 총수가 잘 모르는 사업은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 총수 지배체제는 효율적인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군대라면 모르지만 기업은 바뀌는 환경에 잘 적응해야 하고, 사업 부문마다 독특한 성격도 있다. 중앙집권 방식은 도저히 맞지 않는데도 총수 권력유지를 위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총수는 지분도, 능력도 아닌 ‘말 안 들으면 참수한다’는 권한 하나로 컨트롤한다. (기업이 제대로 되려면) 총수가 초법적인 통제권을 놔야 하는데 놓질 못한다. ‘유리병 속의 사탕을 쥐려다 주먹이 끼어 있는 꼴’이다.”
- 일본은 패전 후 미 군정이 재벌 해체라도 했다.
“재벌개혁 반대론자들은 ‘주인 없는 회사’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지만 서양이나 일본은 대부분 주인 없는 회사다. 그럼에도 꾸준히 개선하고 성과 내는 조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왔다. 한국은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의 위기다. 각 분야에서 좋은 사람이 크고, 리더가 되는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도 도입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흉내만 내고 변죽만 울리다 제도가 형해화됐다. 총수의 초법적 경영통제권을 비용 안 들이고 유지·세습하려니 메리토크라시가 안되고 사업 포트폴리오의 효율화도 망가지고 있는 거다. LG 구본무 회장은 듣기론 그래도 의식이 있다.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라며 겸손해하고, 권한 위임도 잘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CJ 이미경 부회장 경질 사건은 쌍방과실이다. 기업은 세금 안 내고 세습해야 하니 약점이 있다. 권력자들이 권력남용을 쉽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사법 처벌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 재벌개혁을 고민해온 학자들이 사법개혁이 핵심이라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고치려 들면 다 고쳐야 하니 결국 어디서 맥을 따느냐인데, 그게 사법개혁이라는 거다. 있는 법이라도 지키도록 하고 안 지키면 큰 처벌을 받는다는 원칙만 제대로 서도 엄청나게 변할 수 있다는 거다.”
주진형은 배임횡령에 대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예로 들었다. 기업인들이 유죄판결을 받아도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지 않도록 양형기준의 바닥을 높여놔야 한다는 것이다. ‘걸리면 작살난다’는 교훈을 주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검찰개혁·사법개혁이 우선이다.
■ 정당 정책, 진지하지도 치열하지도 않다
주진형은 세계은행에서 컨설턴트로 6년을 근무한 뒤 삼성전자로 옮겼다. 이어 삼성증권과 우리금융지주 등을 거쳐 3년 임기의 한화투자증권 대표를 마친 뒤 지난해 2월 더불어민주당 총선정책공약단 부단장을 맡았다. 이례적인 궤적이다. 이유를 물으니 “원래 (앞뒤) 안 보고 뛰어내리는 게 특기”라고 한다.
- 현 집권세력은 경제 분야 비전이 뚜렷하지 않았다.
“이명박의 7·4·7 공약이 거짓말로 드러났고, 내놓을 게 없으니 박근혜가 야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뺏어왔다. 자기들 고유의 비전이 없음을 인정한 거다. 총선 때 보니 새누리당은 내용이 아무것도 없더라.”
- 달리 보면 경제에서 ‘요거만 하면 좋아지겠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탓도 있다.
“아까 말한 사법개혁이 ‘요거’인데 박근혜는 정치검찰을 이용한 게 아니라 ‘검찰정치’를 했다. 그러니 개혁을 할 수 없다. 4대 부문 개혁에 금융이 포함됐는데 왜 끼었는지 아무도 모르더라. 노동개혁도 공기업·대기업 노조가 과도한 혜택을 누린다는 공감대는 있지만 그렇다고 성과연봉제로 가자는 것은 하책이다. 구조적인 경직성의 원인이 뭔가를 고민했어야 한다.”
-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나.
“실업보험 확충을 먼저 시작하고 그것과 바터(교환)해야 지지를 받았을 거 아닌가. 공공부문 개혁도 부채 규모가 이슈가 아니라 정부가 안 해도 되는 걸 많이 갖고 있는 게 문제다. 교육은 탈중앙화로 가야 하는데 교육부가 교부금으로 목줄을 쥐려 한다. 이걸 바꾸는 게 개혁이다.”
-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공약 작성에 참여해보니 어떻던가.
“인력도 실력도 없었다. (모든 정책을) 시민단체와 교수들에게 ‘외주’ 주는 데 그친다. 의원들이 무슨 정책을 내놨는지 코디네이팅도 잘 안된다. 영국은 정치 초년병들이 당 정책국의 트레이닝을 거쳐 국회의원과 각료가 된다. 데이비드 캐머런, 토니 블레어 총리 모두 그랬다. 우린 제대로 된 정책개발 부서가 없고, 여당은 공무원 거, 야당은 시민단체 거를 갖다 쓴다. 정치인들은 정책을 ‘맨 나중에 골라 걸치는 옷’ 정도로 친다. 원내대표가 매년 바뀌고, 정책위의장은 더 자주 바뀐다. 어떻게 정책을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겠나.”
- 총선 때의 경제민주화 의제 상당수가 최근 ‘촛불입법·정책과제’에서 빠졌다.
“비판을 받으니 뒤늦게 당론으로는 유지한다고 하더라. 정책에 대해 치열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국민도 진지하게 안 받아들인다. 정당의 정책 공약은 그냥 ‘훅’ 하고 뿌려보는 거다.”
- 다음 정권이 경제 분야에서 꼭 해야 할 과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재벌개혁이 가장 큰가.
“재벌개혁은 체질에 관한 거라 당장 효과가 안 난다. (메르켈 총리처럼) 집권을 10년씩 하지 않으면 어려울 수도 있다. 단기 이슈는 거시정책인데 부동산과 가계부채가 문제다. 관료한테 맡기면 ‘폭탄 돌리기’만 할 거다. 대출을 점진적으로 죄고, 부동산 가격 하락을 감내하면서 은행 자본확충 방안을 놓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기업부채로 IMF 외환위기를 맞은 이후 가계빚 팽창으로 경기를 받쳐왔는데 그 빚은 한 번 터지게 돼 있다. 신용긴축을 하면서 줄어드는 총수요는 재정으로 떠받쳐야 한다. 재정을 공공건설에 쓰지 말고 가계에 직접 꽂아줘 소비효과를 늘려야 한다. 등록금을 깎아주고 실업보험을 확충하는 식이다. 가계에 직불금을 주면 효과가 확 커진다.”
- 화제를 바꿔보자.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가 막대한데도 성과가 빈약한 이유는 뭔가.
“그것도 거버넌스 문제다. 성과 평가는 그 조직을 잘 아는 이들이 해야 하는데 관료들이 한다. 관료들은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정량 지표 개발에 골몰한다. (연구) 내용은 알 바 아니다. 서양에선 직급이 낮을 때부터 성과 평가 경험을 쌓지만 한국에선 인사 한 번 안 해본 사장들도 있다. 이건 위험한 거다. 게다가 윗사람이 계속 바뀌니 실력주의가 자리를 못 잡는다. 외국 대학을 보면 150년간 총장이 10여명에 불과한 곳도 있다. 하지만 이사회, 학생, 교수와 협의하며 민주적으로 끌고 간다. 권력을 나누면 ‘장기 집권’이 아니다.”
- 결국은 조직운영이 문제라는 건가.
“기술도 쌓여야 하지만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조직운영 경험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은 과거 일본군대식의 극도로 중앙집중화된 조직운영이 사회 모든 분야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자율화와 분권화가 국가차원만이 아니라 직장 안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이게 직장민주화다.”
■ “한국의 진보, 연대의식 결여”
주진형은 자신의 생각과 가장 비슷한 인물로 2014년 타계한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를 꼽는다. “재벌개혁을 고민하다 결국은 사법개혁이 가장 중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는데 그와 생각의 흐름이 비슷했다.” 진보진영도 개혁과 수구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도 같다.
- 진보진영의 경제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자본주의의 강점을 안 보려 하고, 오히려 국가 규제를 더 선호한다. 대기업 노조의 폐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전에 기아차에 대해 국민기업이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한 게 대표적이다. 복지도 소득이 끊긴 노인을 우선시해야 하는데도 소극적이고, 고용보험 확충도 제대로 이슈화하지 않는다. 독과점 체제의 원청구조에 있는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진보’를 자칭하지만 외부의 노동자를 위해 양보하거나 연대의식을 발휘한 경험이 (거의) 없다. 중소기업 노조를 조직화하는 노력도 안 보인다.”
주진형은 한국 사회가 조선시대의 신분사회 코드에 일제강점기의 국가운영 방식, 전후 미국식 제도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고 본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퇴행적인 갈라파고스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재벌들이 자본주의의 근본을 망치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금수저 아니면) 돈을 못 벌지 않나. 한국 사회는 갈라파고스 생물처럼 죽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걸 정상으로 돌려야 한다.”
- 이야기를 정리하면 거버넌스 개혁이 경제에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모아질 것 같다.
“합리적인 시장경제 제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성장 여력이 생긴다. 사람을 키우고 쓰는 방식, 권한을 나누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직장민주화도 성장동력이 된다. ‘새로운 먹거리 산업이 어떻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100100&artid=20170106230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