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학, 마중물
참 어이없기도 해라
마중물, 마중물이라니요
물 한 바가지 부어서
열 길 물속
한 길 당신속까지 마중갔다가
함께 뒤섞이는 거래요
올라온 물과 섞이면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그 한 바가지의 안타까움에까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나요
철렁하기도 해라
참 어이없게도
천양희, 눈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어둠 속을 더 잘 보려고 눈을 감는다
눈은 얼마나 많이 보아버렸는가
사는 것에 대해 말하려다 눈을 감는다
사람인 것에 대하여 말하려다 눈을 감는다
눈은 얼마나 많이 잘못 보아버렸는가
이상국, 기러기 가족
아버지 송지호에 좀 쉬었다 가요
시베리아는 멀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최승호, 자동판매기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렀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는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라고 불러도 되겠다
황금교회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