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꿈의 진리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정보와 서비스를 먹고는 못 산다
이 몸의 진리를 건너뛰면 끝장이다
첨단 정보와 지식과 컴퓨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끼 밥을 길러 식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 막장에서 매캐한 공장에서
쇠를 캐고 달구고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대신 누군가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한다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털고 일어서는
바로 그때가 인류 파멸의 시작이다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다
임동확, 고별사
잘 가라 내 청춘
미친개들의 입에서 입으로 뺏고
빼앗기며 핥고 깨물어도 아직 삼켜지지 못한
뼈다귀 같은 슬픔뿐이어도
제대로 된 긴 전망 하나 없이도
끄떡없이 저 피의 세기를 건너왔느니
끝내 신원 될 기약조차 없이
생매장된 검은 기억의 꽃밭 위를 맴돌다가
금세 날아가 버린 나비처럼
나의 눈길은 저 언덕 너머 양떼구름을 쫓고 있느니
검고 윤기 나던 긴 머리칼 한번
뽐내지 못한 채 죄 없이 쥐어뜯다가
어느새 새하얗게 세어버린 청춘의 날들이여
잘 가라
그 어느 연대, 땅에선들
청춘의 날들은 억지로라도
괴롭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랴
잘 가라 내 청춘
다가오는 날들이 결례 같은 죽음뿐 일지라도
무작정 떠밀려온 채 살아 애쓰는 여기가 나의 거점
그때 그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이 없다면
이토록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꿀 수 없으리
고재종, 사과꽃 길에서 나는 우네
사과꽃 환한 길을
찰랑찰랑 너 걸어간 뒤에
길이란 길은 모두
그곳으로 열며 지나간 뒤에
그 향기 스친 가지마다
주렁주렁 거리는 네 얼굴
이윽고 볼따구니 볼따구니
하도나 빨개지어선
내 발목 삔 오랜 그리움은
청천(靑天)의 시간까지를 밝히리
길이란 길은 모두
바람이 붐비며 설렌다네
유재영, 먼 길
세들어 살던 떡갈나무 숲을 비우고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오소리 가족이 있다
지난 밤 먹을 것을 구하러 인가 가까이 갔던
막내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힐끗 뒤돌아본 떡갈나무 숲에는
벌써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은 스푼 같은 달이 뜨는 곳
함민복,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