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diyojeninficisi.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m5Eu1mRNd2g
조지훈, 민들레꽃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냐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최문자, 꽃은 자전거를 타고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게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은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황학주, 커어브
문방구 근처로 명랑한 선생님의 백묵처럼 눈발이 날린 뒤
도로 비가 오고
블록담을 다 돌아가지 못해
떠오르는 당신의 창
있다가 없어진 튼튼한 구식의 가전제품 모델 같은
안아도 안아도 얼음배긴 염창동의 그리운 사랑이여
사랑은 크게 흘러내리는 눈물 끝을 믿는 것이어서
이담에 보면 어둡게 오래 선 우리 사랑도 보이게 될까
풀잎들은 경사지를 잡아맨 채 강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가쟁이 근처 사고가 있었던 듯
새집 둘레는 얼어깨진 화분처럼 걸려 있다
이 한강 줄기에 저렇게 작은 집이 아프고
더 작은 내 마음의 집 안으론 비의 넌출이 쑥쑥 걸어오는데
교량 위 도저히 변하지 않는 바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진 당신과 나는, 이 시대는
커어브가 가능할까 또 조용한 눈물은 직진해 내린다
이홍섭, 내 마음 속의 당나귀 한 마리
내 마음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당나귀 한 마리 살고 있다
귀가 몹시 커다랗고
고개를 잘 숙이는 당나귀
그 당나귀가
잘 우는 당나귀인지, 잘 안 우는 당나귀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오랜 친구를 찾아가거나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이 도시의 외곽을 배회할 때
어느덧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당나귀 한 마리
나는 이 당나귀가 좋아
풀만 먹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박서영, 밤비
빗방울이 적시는
기억의 방은 모두 다르다
폐허의 모든 것
만신창이의 모든 것
비는 골고루 시원하게 할퀴어준다
허덕이면서
세차게
엄마의 젖을 빨아대는 아이처럼
구름은 입술을 움직인다
이렇게 할퀴는데도 조금 젖을 뿐이다
너무 빨리 몸이 말라 버린다
적어도 건물의 한 귀퉁이는 찍어내야
패망이라고 할 수 있다
목에 걸린 옷은 짐승처럼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대원동 시절 미쳐 집 나간 언니처럼
사지를 비틀어댄다
만신창이의 모든 것
웃음소리인 듯
울음소리인 듯
창 밖에는 여전히 빗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