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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대화합조치'라는 것을 발표해 일부 양심수를 석방하고 제적 학생의 복학을 허용했다. 부림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청년들이 출소해 돌아오면서 주변에 자꾸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자고 했다.
일손이 모자라서 부림사건 때 제일 오래 불법구금을 당했던 송병곤 씨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는 이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문재인 변호사가 몸담은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정말 마음이 곱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월급 받으며 편하게 사는 것 자체를 몹시 괴로워했다.
그를 지켜보면서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건호를 생각했다.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쉬웠지만, 내 아들한테 고난의 삶을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변호사와 손을 잡았다. 원래 모르는 사이였지만 1982년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법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서도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정직하고 유능하며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사건도 많았고 승소율도 높았으며 돈도 꽤 잘 벌었다.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정권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나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열정의 시기를 맞았다. 나는 막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처럼 민주화 투쟁에 몰입했다. 실제 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중에는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이 되어 직접행동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도 변론할 사건이 엄청나게 밀려들었고, 나는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부산말고도 울산, 마산, 창원쪽에서 노동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곳에는 인권변호사가 없었다. 모두 내 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거제도와 경북 구미공단까지 출장을 가야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 모든 일을 함께 했다.
나는 돈 버는 일을 전폐했지만 그는 사무실 운영을 도맡아 하면서 매월 내게 생활비를 주었다. 부산에서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있는 힘을 다했고,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아 주었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서 대통령 임기 내내 나를 도와주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리와 퇴임 후 검찰 수사 때도 내 곁에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것은 그저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이 말은 문재인 개인에 대한 것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부족했던 나를 민주화 운동으로 이끌어 주고 내가 정치권으로 떠난 뒤에도 굳건하게 부산을 지켰던, 부산 지역 시민사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 뜨거웠던 6월의 밤 아스팔트 위에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부산의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들 모두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여러번 낙선하면서도 부산을 아주 떠나지 못한 것도 그분들과 함께 이루었던 모든 것, 그분들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 유시민 정리 82-87쪽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