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혜원,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나에게
그대는 편한 사람
그대로 인해
사랑의 문이
열릴 수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소문도 없이 다가온 그대
약속도 없이 다가온 그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만났지만
아무런 말 없이도
가까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그대가 있어
이 세상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좋은 사람
나에게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
나희덕,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는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서정윤, 느낌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 상처가 문드러져 목숨과 바꿀지라도
우리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건
가슴 무너지는 소리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미 막아버린 자신의 성 허물어지고
진실의 눈물로 말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 내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나의 고집, 즐겨 고개 숙이는 것을
익히는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질지라도
즐거울 수 있음으로, 우리는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다
이선영, 개미
개미 한 마리가 방 안을 기어다닌다
개미가 내 몸에 닿을까봐
나는 개미를 피해 자꾸 방 안을 옮겨다닌다
방이 좁아진다
개미 한 마리가 방 하나를 다 가져간다
내 마음의 방 안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들었다
개미가 온 방 안을 돌아다닌다
나가지 않는 개미 한 마리를 피하려다
내 마음의 단칸방 하나가 통째로 개미의 차지가 된다
정양,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껐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