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폭풍우
내 허리를 휘감아 줄
사내는 없는가
저 야생의 히스크리프처럼 털이 세고
하나밖에 다른 것은 모르는 밤의
다시는 용납할 수 없는
아픔이 땅 위를 딩굴고 있다
붉은 머리 풀어 헤치고
으르렁거리는
목 아프도록 징그러운
그리움이여
먼 바람 속에서
무덤이 나를 삼키려
달겨든다
죽은 에미의
밥상에서는 그릇이 저 혼자 깨지고
수천 번 쏟아지는
서슬 푸른 기침을 따라
밤새 비단벌레 같은 여자가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있다
서정윤, 가끔은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벗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김용택, 그리운 그 사람
오늘도 해 다 저물도록
그리운 그 사람 보이지 않네
언제부턴가 우리 가슴 속 깊이
뜨건 눈물로 숨은 그 사람
오늘도 보이지 않네
모 낸 논 가득 개구리들 울어
저기 저 산만 어둡게 일어나
돌아앉아 어깨 들먹이며 울고
보릿대 등불은 들을 뚫고 치솟아
들을 밝히지만
그 불길 속에서도 그 사람 보이지 않네
언젠가, 아 그 언젠가는
이 칙칙한 어둠을 찢으며
눈물 속에 꽃처럼 피어날
저 남산 꽃 같은 사람
어는 어둠에 덮혀 있는지
하루, 이 하루를 다 찾아다니다
짐승들도 집 찾아드는
저 들길에서도
그리운 그 사람 보이지 않네
황도제, 사랑 한 줌
가볍고 부드러운 것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때론 한없이 커 보이는 것
늘 부족하여 채워지지 않는 것 그러나 한 줌이면 충족 되는 것
따스한 것 그래서 몸 속에서 녹아 내리는 것
눈물의 뒤편에서 빛나는 것 죽음의 저쪽에서 환해지는 것
줄 때에 기쁜 것 줄수록 더 많이 생기는 것
한 없이 한 없이 주어도 괜찮은 것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것
곽재구, 새벽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람의 섬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섬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