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물에 뜨는 법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 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신병은, 나를 벗고 싶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
허접스레 지나온
그림자까지 따라와 함께 걸린다
축쳐저 있는 어깨마저 닮아 있는
또 다른 나를 벗으면서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하루
다가오는 아침은 바람소리
함께 우는 텅빈 들녘이었으면 좋겠다
아침 이슬 한 방울 공양한 풀이었으면 좋겠다
강아지풀, 자운영, 재비꽃의 연초록
맑은 기지개였으면 좋겠다
고정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 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밖에는 내가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강물 이루니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래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박인환,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가느다란 1년의 안젤루스
어두워지면 길목에서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숲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의 얼굴은 죽은 시인이었다
늙은 언덕 밑
피로한 계절과 부서진 악기
모이면 지낸 날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저만이 슬프다고
가난을 등지고 노래도 잃은
안개 속으로 들어간 사람아
이렇게 밝은 밤이면
빛나는 수목이 그립다
바람이 찾아와 문은 열리고
찬 눈은 가슴에 떨어진다
힘없이 반항하던 나는
겨울이라 떠나지 못하겠다
밤새우는 가로등
무엇을 기다리나
나도 서 있다
무한한 과실만 먹고
김윤자, 촛불은 말한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걸
알고 있어요
다 타고나면
주저앉는 것도 알고 있어요
흐르는 눈물이 차갑다고
탓하진 마시어요
청산을 그리다가
청솔을 그리다가
불꽃 속에 날개치는
천년의 학이 되어
꿈꾸듯이 하늘하늘 날아오르는거라고
길이라곤 이 길뿐이어서
불로만 나를 녹일 수 있어서
내가 녹아 죽어야만
청산에 갈 수 있어서
단단한 나의 몸을
지금, 녹이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여겨 주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