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감명깊게 봤지만 그 뒷이야기를 최근에야 알았는데
제작과정또한 한편의 영화더라구요
필력이 후지지만 한번 써보려구요
2009년 6월 비가 내리는 중국 남경의 손중산묘비앞에
비를 맞으며 서있는 중년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3분넘게 중얼거리다가
뒤돌아섯을때 거짓말처럼 비내리던 하늘이 맑아졌다고 한다
2009년 12월 "8인의 결사단"영화가 개봉하는날
감독은 진덕삼은 혼자 불꺼진 방에 숨어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한편의 영화를 위해 진덕삼은 10년이란 세월을 준비했다고 한다
10년전 1999년 홍콩의 영화계에는 이런 이야기돌았다고 한다
그거 알아? 어떤 미친놈이 대본하나 들고 6800만의 투자를 할 투자자를 찾아다닌대
1999년에 6800만 홍콩원이면 100억한화 랍니다
10년전에 100억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 투자자를 찾기는 불가능이라고 봐야죠
1999년에 엄청난 흥행을한 주성치의 희극지왕이 2800만의 수입을 냈다니
6800만이라면 엄청난거죠
그 성 말이야 안 만들면어때?
10년 동안 직던삼이 가장 많이 들었던말
진덕삼이 중국의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세트장을 발견못하자
1900년의 홍콩의 거리를 그대로 다시 만들어내겠다고 결정했답니다
그래서 100억이란 거액의 투자금이 필요했구요
성만 문제가 아니였죠
진덕삼이 원했던 배우명단
장국영 유덕화 주성치 여명 곽부성 주윤발 양조위 양가위 이가신 증지위
ㅎㄷㄷ하죠ㅋㅋㅋㅋㅋ어마어마 하죠
홍콩을 주름잡던 드림팅을 원했던거죠
미친놈 소리 들을만도 했죠
4년의 노력끝에 드디여 투자자를 찾아내고
9명의 배우를 섭외하고
세트는 촬영후 여행명소가 될수 있다고 홍콩정부를 꼬드겨
홍콩정부의 지원으로 드디여 세트지을 땅 두개를 월8000원에 따냈죠
한화로 치면 엄청나게 큰 땅을 월150에 빌린셈이죠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큰 세트를 지으려면 19개부서의 서류증명이 필요한답니다
그걸 다 받으려면 2년이란 시간이 필요한다죠
진덕삼은 좌절합니다
도대체 내가 영화를 찍으려는건지 성을 지으려는건지 나도 이젠 헷갈린다
하지만 포기하기 싫었던 진덕삼은
마침내 2002년겨울에 중국의 불산근처에 세트를 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달후 바로 근처에서 2002년 중국을 휩쓸었던 독감 사스가 터집니다
결국 영화를 찍던 스탭들이 홍콩으로 다 돌아가고
어쩔수 없이 세트제작은 한달만에 망합니다
1년후 사스가 물러나고 다시 불산으로 돌아간 진덕삼
2004년 1년을 거쳐드디여 완성한 세트장을 보면서
진덕삼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이제 한달후면 영화촬영을 시작할거니까요
근데 진짜로 그건 꿈이 였죠ㅠㅠ
투자자가 사기를 맞고 사업이 망하여 자살을 합니다
당장 스탭들 월급이 없는상태
세트장에서 이미 공인들이 난리를 칩니다
동시에 홍콩에 있던 진덕삼의 어머니가 병때문에 입원합니다
누나는 암때문에 수술을 해야하고
홍콩에 돌아간 진덕삼은 차사고로 병원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렇게 진덕삼은 반년동안 사라졌죠
진덕삼이 미쳣다
영화계에 소문이 돌고있을때
불산의 모든 사람이 철수한 세트장안에
진덕삼과 미술감독 두사람이 무릎꿇고 통곡했답니다
5년의 준비와 노력이 물거품이 됬죠
2008년 사업에 성공한 한 친구가 진덕삼을 찾아와 한마디를 합니다
그 영화,얼마가 필요하든 찍어봐 내가 투자할께
4년의 비바람속에 불산세트장은 이미 페허가 되있는 상태
모든것은 새로 시작을 해야합니다
9년이 지나고 세월은 너무 많이 흘러갔습니다
장국영은 세상을 떠나고
주성치은 배우은퇴를
이가신은 시집을 갔죠
더 이상 그때의 드림팀은 불가능한 상태
10년후 드림팀중 4명이 다시 찍기로 합니다
여명은 10년전 주성치가 하기로 했건 류위바이역을
양가위는 10년전 악당을 하기로 했지만 혁명가역을
증지위는 10년전 상인리위탕역을 하기로 했지만 경찰역을
이가신은 이영화를 위해 다시 컴백을 하죠
이미 재벌가며느리가된 이가신을 진덕삼이 찾아갔을때
이가신은 한참 추억에 잠겨있다 흔쾨히 복귀를 했다죠
10년이란 세월이 너무 많은것을 바꿔놨지만
변하지않는것들이 있기에 운명이란 아름답죠
2009년 2월 진덕삼은 또다시 역경에 부딧침니다
새로 만든 세트장은 때아닌 폭우때문에
촬영시작도 못하고 시작을 한달을 미뤄야하지만
후에 합류한 이위춘 견자단은 스케줄이 차서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힘들 상황
하지만 결국 3월에 시작한 촬영
6월까지 3개월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상황
진덕삼은 자지도 않고 세트장을 나눠
친구 감독 유위강을 섭외해
두개의 촬영세트장을 오가며 동시촬영을 합니다
2009년 12월 드디여 상영한 영화를 보면서
진덕삼은 눈물은 감추지 못했다죠
혁명을 하는 영화를 찍어낸 과정자체가 혁명같은거니까
손중산의 묘비앞에서
진덕삼이 중얼거렸던 말은 이거람니다
10년의 세월,제가 찍어낸 영화는 선생에게 미안하지 않을 그런 영화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