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lunadefierro.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nkA4VUeHu_U
최영호, 불길
사랑 저문
질펀한 가슴속에
한 줄기 불길이 인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흘러간 시간
다시는 젖어들 수 없이
비워낸 추억
거센 불길로 솟구쳐
가뭇없이 타들어가고 있다
고독에 취한 나의 늑골
그 어딘가를 파고드는
지독한 통증
박곤걸, 하늘 말귀에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서서
빈 손 털고
천근 만근 어깨 짐을 벗는다 한들
마음 자락을 얼룩지어 놓은
이 허물을 다시 어쩌랴
무거운 욕망의 부피를 동여매어 놓은
질긴 집착의 밧줄에
꼬리표를 매달았던
이름 하나를 떼어낸다
하늘이 일러주는 말귀에 눈을 열고
느지막에 쓰는 시가 신앙이듯 깊어
너를 벗어나는 삼매경(三昧境)이라 한들
너를 비워내는 무아경(無我境)이라 한들
마음이 거울이라, 다시 닦으려니
검은 얼국이 번지는
이 세상 젖은 바람이야 씻어낼수록 자국이 남는
이 번민을 또 어쩌랴
다시 하늘을 우러러 마음 하나 씻으려니
문명의 편리에 아주 익숙해져서
사상은 매연에 너무 찌들었고
제 스스로 고운 때깔이 나지 않는
헛된 허울뿐을 이제 어쩌랴
이근배,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어느 날 문득
서울 사람들의 저자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산이 내 곁에 없는 것을 알았다
낮도깨비같이 덜그럭거리며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며
사랑 따위를 팔고 있는 동안
산이 떠나버린 것을 몰랐다
내가 술을 마시면
같이 비틀거리고
내가 누우면 따라서 눕던
늘 내가 되어 주던
산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가 들르는 술집 어디
만나던 여자의 살냄새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아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산이 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박재삼,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유안진, 꽃으로 잎으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뭐니뭐니 해도
사랑은 아름답다고
돌아온 꽃들
낯 붉히며 소곤소곤
잎새들도 까닥까닥
맞장구 치는 봄날
속눈썹 끄트머리
아지랑이 얼굴이며
귓바퀴에 들리는듯
그리운 목소리며
아직도 아직도 사랑합니다
꽃지면 잎이 돋듯
사랑진 그 자리에
우정을 키우며
이 세상
한 울타리 안에
이 하늘 한 지붕밑에
먼 듯 가까운 듯
꽃으로 잎으로
우리는 결국
함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