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기,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당신이 지나고 있네
풀잎을 밟으시면, 풀잎 소리로
대 밭을 밟으시면, 댓잎 소리로
저기 당신이 지나고 있네
그 언젠가 당신이 나를 지나가실 때
으스러지게 당신을 껴안았더니
너무나도 어지럽던 그 밤
끝내 긴 울음으로 당신을 배워
당신이, 내 여름을 지나가시면
까끌까끌한 볏잎 소리로
내 가을을 지나가시면
누런 벌판의 그 술렁거림으로
눈감고 가만히
당신이 지나가시는 소리
오늘은 내 창을 흔들어 지나가시기
온 등(燈) 밝혀 가난한 밤을 맞으니
내 가슴, 당신 지나가는 소리
당신 가슴, 내 지나가는 소리
윤동주,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방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璪)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이광웅, 연못
연못은
내 푸르렀어야 할 나이의 부끄러운 고백들이
어머니 얼굴 밑에
가라앉는 것을 봅니다
사소한 수많은 화살촉이 찍힌 자리에
내 얼굴을 묻어 보면은
연못은 내 가슴 속 오열의 샘터에서나처럼
억제해 온 물살을 파문지우며
사랑의 물놀이를 성립합니다
연못을 들여다보며 내가 조용히 눈물 뿌리는 것은
고풍한 사원에
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정하,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나태주,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