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풀씨
풀씨에는 조그만 거울이 있다
자신을 비추는 내면이 있다
바람을 타고 알지 못하는 세계로
펼쳐갈 그의 초록빛 미래
풀씨에는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있고
까르르 함박웃음이 감춰져 있다
농부의 낫이 허리를 자를 때까지 잡초로 살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지혜
그러기에 정갈한 모든 것을 매달고
성자처럼 이슬은 반짝인다
나무야 바위야 끝간 데 없이 뻗은 길들아
풀씨 하나 날리려고
산은 첩첩이 돌아앉고
계절은 성큼 다가서는가 보다
누가 함부로 부질없다 하리
인생은 하찮은 일상에서 풀씨를 키우는 과정이거니
마음에 담아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물처럼 낮은 곳을 흐를 일이다
신경림, 댐을 보며
강물이 힘차게 달려와서는
댐에 와 부딪쳐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다시 파도를 이루어 헐떡이며 달려오지만
또 댐에 부딪쳐 맥없이 깨어진다
깨어진 물살들은 댐 아래를 맴돌며 운다
흐르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소리내어 운다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강물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댐을 뛰어넘자고 깨어부수자고 달려온
그들 자신이 어느새 댐이 되어 서 있다는 것을
파도를 이루어 뒤쫓아오는 강물을
댐이 되어 온몸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이제 저 자신이라는 것을
이재무, 이별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임정수, 여름의 끝자락에서
여름은
잔인하게 끓이고
태워버리는 용광로
사계절을 기다려
칠팔월을 달구어
비장하게 숨통을 조이고
절규하다가
지금은
남루(襤褸)한 자락으로
막바지 발악을 하며
입추(立秋)의 문턱을
거슬러 오른다
열기는
피부로 스며드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냉정히 내 가슴을 덮는다
신수현, 파도
그가 없다
나를 물밀 듯이 휘젓다가 또 사라졌다
그가 없으니
사방 햇볕 속에서 마음은 종일 그늘이다
햇살 한줌 담아본다 빈자리에 펼쳐놓는다
희디흰 모래밭이다
그를 불러본다
음성도 문자메시지도 닿지 않는 섬
그가 온다
올 듯 말 듯 오래 달려온다
나는 미리 차 올라
쓰러진다 그가
어깨를 내주고 팔을 둘러준다
남은 숨들 이제야 깊어진다
발자국 다져진 길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남기는
반복이 아니면서 반복인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