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문인수, 바다책, 다시 채석강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강형철, 늙지 않는 절벽
어떤 세월로도 어쩔 수 없는 나이가 있다
늘 '내새끼'를 끼고 다니거나
그 새끼들이 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일까
걱정만 몰고 다니는
그 새끼들이 오십이 넘고 육십이 되어도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아
눈썹 끝엔 이슬만 어룽대는
맛있는 음식물 앞이거나 좋은 풍광도
입 밖의 차림새, 눈 밖의 풍경
앞가슴에 손수건을 채워야 안심이 되는
어머니란 나이
눈물로만 천천히 잦아드는
마을 입구 정자나무 한 그루
그래도 끝내 청춘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김소월, 산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