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홀로와 더불어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임강빈, 달빛
달빛은
한동안 잊고 있던
어머니의 시간이다
고샅으로 내려와서
황량한
집 마당으로 모이게 하고
벌레소리도
뚝 멈추게 하고
거푸거푸 조용하라 하신다
밟아도
좀체로 부서지지 않는
달빛
채우라 하신다
반쯤은
네 몫이라 한다
나머지 반쯤은 무엇일까
고독일까
아니면 그 언저리일까
유안진, 설록차를 마시는 때
생활을 눈 따악 감고
구름되어 흐르고만 싶을 때
설록차 한 잔 물에
구름 띄워 마셔본다
맛없음의 참맛이야말로
부처님 미소로 데려가주는 듯
더는 못 참겠다
깜박 넋이 나가려는 때
한 모금 설록차를
두 모금에 나눠 마신다
그사이 부딪치는 찻잔소리
타일러주는 드맑은 음성
잔 안에 가두어지는가
그리움아 섧은 꿈아
차가운 흰눈의 빛깔
백설의 향기와 함께
폐허를 어루만지듯
늘 내 마음에 찰랑거려라
이태수, 허공의 점 하나
작아지고 작아진다
사실은 작아지지만은 않는다
지난밤 꿈속에서 물방울 속으로
들어갔다.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그 조그맣게 둥글어진
빈곳에서 눈을 떴다. 빠르지도
느리지 않게 아침이 오고
풋풋하게 뛰어내리는 햇살들
다시 눈을 들면 여기는 여전히
먼지바람 흩날리는 세상, 바삐 돌아가는
사람들과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수레의 헛바퀴 돌아가는 소리, 그 속으로
자꾸만 빨리어 들어가다 보면
저 망망한 허공의 점 하나
지우고 지워낸다
아무래도 지워지지는 않는다
나희덕, 실려가는 나무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다른 생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기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낯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를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나도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을 다시 읽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