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정현종, 지난 발자국
지난 하루를 뒤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思考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니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최옥, 눈이 내리면 편지를 씁니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편지지 한장이
됩니다
단 한 사람에게만
보낼 수 있는 편지
내 사랑도 이렇게
한번씩은 말문을 여나 봅니다
괜히 할말이 많아지지만
하고픈 말 한마디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만
숨쉬는 당신
쌓아만 두어서
사랑도 때로는 당신을 가리는
높다란 벽이더니
눈이 내릴때마다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묻어두고
처음 당신을 사랑하던
마음만 남았습니다
최재환, 산다는 것
산다는 것은
맺힌 매듭을 푸는 일이다
그것은 바램이다
죽는 날까지
아슴프레 떠오르는 지평을 향해
꾸준히 신발을 고쳐 신는
영원한 바램 그것이다
주인 없는 시공을 받치고 서서
부모형제와 이웃들
또 다른 나와의 조우
오가다 마주치는 눈길도
희노애락의 어느 길목에서
무심코 버린 한숨도
삶을 확인하는 소중한 인연이다
쉽게 맺힌 매듭도
쉽사리 풀리진 않는 법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풀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발버둥 치다보면
어느덧 해는 서산에 구르고
전생의 아픔은 조용히 닫히는 것을
설혹 풀렸달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굳게 맺히는
매듭들을
하루살이처럼 시간이나 축내며
자꾸자꾸 풀고 맺는 세상살이
산다는 건
결국 풀린 매듭을 다시 맺는 일이다
박종수, 붓으로 쓰는 삶
한 밤중에도 먹을 갈면
향내가 방안 가득하다
붓으로 시를 쓰면
내 삶에도 향이 배일까마는
그래도
다시 지울 수 없는
나의 한 평생이
용서받고 싶은 마음만은
묵향 속에 묻히고 싶어
서러운 지난날을
먹으로 갈아서 갈아서
성찰을 밭고랑을 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