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갈대, 그리움으로 쓰는 말
지들끼리 몸 부비며 우는 까닭을
아는 건 가을입니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것을 알아보듯이
내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슬프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가시던 날도
그대 떠나던 날도
울었던 힘만으로
먼 들판 갈대들이 눕고
오래 익숙한 것들이 이별을 할 때는
독한 얼룩이 지워지지 않듯이
순간들을 기억하는
자국으로 남습니다
갈대들이 몸이 흔들리기 전까지
지상에는 이미
어쩔 줄 모르는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윤광수, 파도 소리
하고픈 말 못 다한 채 되돌아와
갯바람에 날린 듯
흩어지는 하소연을
물새야 너는 알고 있겠지
세월이 할퀴어 쓸려간 내 피안에
마음이 멀면 지척도 천리인 것을
젊음 다 삼킨 수평선 저 넘어
무지개 빛 고운 그날의 사연은
쪽빛 바다에 여울지는 금빛이던 것을
입에 문 흰 거품
주체 못할 그리움으로 뜨며
진실의 한 마디 말 허공에 띄우면
철썩이는 너울아
파도는 후회로운 듯 돌쳐와서
나를 향해 우짖는다
장영헌, 자전거 하늘
다문다문 빛살
으깨진 바람
얼룩져
가슴 시리다
살을 에는 된바람
아스팔트 이글이글
담으로 꽃 피운
자전거 패션
오뚝이 몸부림 그 몇몇 세월
어두운 수렁에서 별자리 잃고
뒤척이는 바닷물 나를 삼킬 듯
나를 영글게 한다
어려움 되씹으며
넓은 들판 다시 조이고
저문 해 불을 댕겨
페달 소리 씽씽
달빛은 내 꿈 속을 열고 간다
이면우,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생활이 단순해지니 슬픔이 찾아왔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빙긋이 웃는다
그렇다 슬픔의 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노동과 목욕, 가끔 설겆이, 우는 애 어르기
좋은 책 쓰기, 쓰레기 적게 만들기, 사는 속도 줄이기, 작은 적선
지금 나는 유산 상속을 받은 듯 장래가 넉넉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도 괜찮다
여름 황혼 하루살이보다 더 작아져도 괜찮다
그리되면 그 작은 에너지로도
언젠가 우주의 중심에 가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노유섭, 풀잎이 한 말
그대가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노을 지는 이 저녁
그대 창가에
불러 드릴게요
그대가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이야기
어느 벤치위로
가랑잎 지는 소리도
그대 가슴에
들려 드릴게요
이리 저리
바람에 불려
그대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날에도
그대 가슴을 스쳐간
아름다운 여인처럼
그대 가슴에 남아
살아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