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채정미, 주름
주름도 오래되면 티눈처럼 굳어져
살아온 세월만큼 어둡거나 무겁다
까아만
눈알 굴리는 광속의 생쥐처럼
내것 아닌 것들로 또 얼마나 분주했나
화석의 길을 걷고
몸으로 그린 나이테 자꾸만 깊어간다
정필자, 어머니, 연꽃에 안기시다
한 생을
연꽃으로 피고 싶었던 어머니
진흙탕 속의 날들
피어나는 연꽃 사랑으로
뒤따라 가리라며 불볕 여름 보내놓고
가뿐 숨 몰아쉬며 손꼽던
볕 좋고 바람 좋은 날
그예 연꽃에 안기셨네
어느 날
소리도 없이 찾아온 병마
씨름하며 밤을 밝혀도
아침이면 솟는 햇덩이같은 열망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 되었건만
저무는 하루의 강엔
삶의 노래 잔잔히 흘러
풍경같은 시린 날들이 걸어들고
스쳐가는 얼굴 얼굴들과의 입맞춤
세월이 알고 길을 여네
그 길 따라
한 생의 징검다리였던 연꽃의 인연
빛으로 바람으로 흩어지며
봄빛 따스한 산란이
가을 무르익은 사랑이
겨울산 빗장 걸어둔 평안이
여름 나무의 푸름 속에 둥지를 틀며
당신의 모습을 새기네
잊히지 않을 영원한 노래로
사라지지 않을 영혼의 빛깔로
한덕원, 촛불
뼈를 사르어
살을 녹이는 아픔을
흐르는 눈물로
소리 잠재우고
어두운 밤 밀자면
어두운 밤을 밀어내고
소원을 빌자면
소원을 풀어주는 그는
인면수심
철면피만은
회유 못한
아쉬움 남긴 채
빈손에 비운 마음의 종말은
맑디 맑은 웃음 웃으며
먹구름 타고 하늘로 하늘로
불 밝혀 웃으며 간다
오두영, 상사화
내 눈 속에 그대 있고
내 마음 속에 그대 있건만
한 하늘 아래 살아가도
만나지 못 한 채
꽃 피고 질 때까지
울고 지내는 마음
한 송이 꽃조차 보지 못한 채
푸른 잎새로 살아야만 한다네
그리워 그리다가 여위어진 몸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날
울어가는 목수이야
아직도 그대 항해
불타는 내 마음
어디에다 묻을까
사랑이여
흘러간 내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