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별도 울 때가
한참, 별들을 멀리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별이 있었습니다
별도 우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 멀리 오래 홀로 떨어져 있어서
서로 만날 가망 없는 먼 하늘에 있어서
아니면
별의 눈물을 보는 것은
스스로의 눈물을 보는 것이려니
밤이 깊을수록
적막이 깊을수록
눈물을 보이는 별이 있었습니다
김요섭, 꽃
손을 대도 데지 않는다
그 불은
이슬이 떨어지면 더욱 놀라는
그 불은
태고적 이야기에 향기 입는다
그 불은
태양도 꺼트리지 못한
이슬의
그 불은
별빛의 씨 땅 위에서 눈을 떴다
그 불은
꽃
고정희.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형기,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을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김남조, 약속
어수룩하고 때로는 밑져 손해만 보는 성 싶은 이대로
우리는 한 평생 바보처럼 살아버리고 말자
우리들 그 첫날에
만남에 바치는 고마움을 잊은 적 없이 살자
철따라 별들이 그 자리를 옮겨 앉아도
매양 우리는 한 자리에 살자
가을이면 낙엽을 쓸고
겨울이면 불을 지피는
자리에 앉아 눈짓을 보내며 웃고 살자
다른 사람의 행복같은 것
자존심같은 것
조금도 멍들이지 말고
우리 둘이만 못난이처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