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수 없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김초혜, 어머니
한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박창기, 대나무처럼
바람 부는 날 대숲에는
깊은 소리가 울린다
심장을 찢을 듯한 소리로 다가온다
대나무는 제몸에
바람을 온통 담을 수 있어도
곧디 곧은 절개가 꺾이기 싫어
온몸으로 맞선다
몇 번의 달램, 까탈스런 휘몰이에
통째로 기울다가 또다시 일어선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세상에서
오히려 당당함이 자랑스러워
더 크게 세상에 외친다
입은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것이
모진 바람에 맞서서
푸르름을 방패로 이웃을 갈무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바보스런 대나무는
스스로 가는 길을 알고 간다
곽재구,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 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김재진, 편지 쓰고 싶은 날
때로 그런 날 있지
나뭇잎이 흔들리고
눈 속으로 단풍잎이 우수수 쏟아져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런 날 말이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은행잎보다 더 노랗게 물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카락 생각 없이 바라보며
꽁무니에 매달려바람처럼 사라지는
폭주족의 소음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런 날 말이지
신발을 벗어들고 모래알 털어내며
두고 온 바다를 편지처럼 다시 읽는
지나간 여름 같은 그런 날 말이지
쌓이는 은행잎 위로 또 은행잎 쌓이고
이제는 다 잊었다 생각하던
상처니 눈물이니 그런 것들이
종이 위로 번져가는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밀고 오는 그런 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