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식, 내 마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흔들거림이 있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거니 생각했습니다
겨우내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메마른 가지마다
꽃피여 보려고 하다
당신께 들켜버린
내 마음 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목덜미가 따스하고
눈 녹듯이 풀어지는 가슴이
바뀐 계절의 길어진
햇살이거니 했습니다
손 내밀어 주던
나즈막한 눈빛을
체온으로 간직하다
당신께 들켜버린
내 마음 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안진,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이승철, 낚시
봄 볕 따스한 날
조용한 호숫가에
낚싯대를 드리우니
물 속에 잠긴 구름처럼
마음도 한가롭다
미풍에 일렁이는 잔물결 위로
찌만 홀로 외로운데
붕어의 입질 신호는 보이지 않고
물 속 깊이 잠수한 하늘 속에
내 그림자만 졸고 있다
물고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물결 따라 퍼져가는
정답던 옛이야기
물 속을 흐르는 구름 따라
보일 듯, 잡힐 듯, 흘러가고
낚아 올리는 것은
추억 한 점
그리움 한 점
돌아오는 바구니 속에는
푸른 하늘만 가득하다
구상,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유자효, 홀로 가는 길
빈 들판에 홀로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동행도 친구도 있었지만
끝내는 홀로가 되어
먼길을 갔습니다
어디로 그가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따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홀로였기에
어느 날 들판에 그가 보이지 않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홀로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없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홀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