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수, 내 안에 빛은
세상의 중력 속에서
렌즈를 조였다 푼다
내 안의 사각과 내 밖의 둥근 원이 만나
그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 두 눈 속에 걸렸던 그림이
틀 속에서 길을 낸다
모눈종이 같은 시절
기다림은 늘 황금분할 선상에 있었지
한점을 향해 수평선을 그으면
바다 위에 무수히 출렁거리는 섬
반환점에서 셔터를 밀었다 당기면
숨죽이던 발광 앞에 어둠을
거뜬히 빠져나오는 초점
번쩍!
반사거울이 구부려준 통로를 따라
빛이 파장을 일으킬 때
내 안에 감겨드는 모두는 그리움이다
류시화, 길 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나호열, 장미를 사랑한 이유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정호승, 연꽃 구경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을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윤성택, 단추를 달며
거울 앞에서 단추를 채우다가
실밥 몇 올 남기고 사라진 행방을 생각한다
가지런하던 일상의 틀 속에서
문득 일탈한 빈자리
멱살 잡혀온 날들에 단추는 내 삶 어디쯤
한 방울 눈물처럼 떨어져 있을까
채우고 풀기를 반복하던 거친 일상 속
실낱같은 인연을 얼마나 움켜잡아 왔던가
실눈으로 눈뜨지 못하는
빈 단추 자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모두 끄르기 시작한다
팽팽한 가닥이 느슨해지면서
대롱거리는 단추들
반짝거린다
몸을 둥글게 웅크려
단단히 바느질을 한다
생(生)을 꿰매는 아침
시간의 숨구멍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