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ugghjessica.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ihBKdin9ajk
김초혜, 마지막 편지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되는
삶의 징벌
쓰기도 하여라
김지향, 호숫가에서
집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알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 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앞의 거울알은
나의 골 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골의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항상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뜯어 내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강은교, 저물녘의 노래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 위의 집들은 가장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듯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문태준, 개복숭아나무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름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이문재, 낮달
일터는 동쪽에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동트는 걸 보며 집을 나서고
을 향해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언제나 앞이나 위에
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낮달이 떴다
늙은 아버지가 나를 낳으신 나이
나는 아직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 동문서답
그러나 낮달이 낮잠을 잘 리 없다
낮에도 하늘 가득 별이 떠 있는 것이다
낮에도 총총한 별을 생각하면
나를 관통하는 천지 사방의 별빛들을 떠올리면
내가 중심이다 너와 내가 우리가
저마다 분명하고 힘차고 겸손한 중심이다
낮달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것을 누가 당신에게 읽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것을 누구에겐가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