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그때는 몰랐습니다
뜬금 없이 찾아온 그대
맘 좋은 척 한자리 내어준 것이
밤낮 가리지 않고 부등켜 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시간의 징검다리 맨 끝
보여주기란 늘 주저함이 있고
어둠에 길들여진 그대
가끔씩 포식되는 햇살 한줌에
목젖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았던
이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물지 못한 사랑이
불뚝불뚝 길을 낸 생채기
부풀어 올라 몸살을 앓아도
한차례 홍역처럼 지나가려니
그래서 늘, 뒷전이었던 그대 생각이
앞질러 새벽을 깨울 즈음
외톨이였던 신음이
참을 수 없는 몸짓으로 들고 일어 난 것을
사랑이라 불리웠으면
애초에 마음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울다 울다 도드라진 아픔만큼
그대도 따라 울지만
별리의 아픔 손 끝 까지 못질할지언정
비켜간 마음자리
두고두고 상흔으로 남겨
오늘을 기억하렵니다
비릿한 한 모금 온전히 사랑으로
그대를 보내렵니다
내 안의 그대를
신종호, 낙조
한 꺼풀 무너져도 좋을 세상이다
말없이 바라보는 노을 진 한강
보기 좋게 넘어지는 사람의 그림자
철교 밑으로 떠가는
주인 잃은 낡은 구두 한 짝
삶이여
흐른다면 모두가 만날 것이다
오세경, 죄(罪)
누가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듯이
나는 죄(罪)만은
죄보다 罪로 쓰고 싶다
그가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고 한 것은
책장마다 꽉 들어차 있는
불온한 영혼들의 심중에 한 획을 긋고 싶은
그 절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죄보다 罪가
더 섬뜩하고 더 죄스럽다
내가 罪라고 쓸 때
冊 안의 그레고르 잠자와
冊 밖의 나는
저 놀람과 두려움과 슬픔으로
잠시 교통한다
罪
벌레 같은 그 글자 하나가
내 우주의 경전이다
모윤숙, 장미
이 마음 한편
호젓한 그늘에
장미가 핀다
밤은 어둡지 않고
별은 멀지 않다
장미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
숲 없는 벌
하늘 티지 않은 길
바람 오지 않는 동산
장미는 검은 강가에 서있다
너의 뿌리는 내 생명에 의지 하였으매
내 눈이 감기기전 너는 길이 못가리
너는 내 안에서만 필 수 있다
봄 없고, 비 없고, 하늘 없는 곳
불행한 내 마음에서만 피여간다
밤은 어둡지 않고
별은 멀지 않다
너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
이재훈, 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