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 공전
둘레에 나이테를 그리며 돌고 있던 나는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늙은 성벽이 되었다
김재진, 은둔의 사랑
그 자리에 네가 있어 주기만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멀리서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스치기 전 한 번쯤 내가 보낸 눈길에
미소짓기만 해도 너를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기다림은 멀고 나의 밤은 채워지지 않는다
단지 제 이름 불러 스스로를 애무하는
고독한 위로
세상 어딘가에 네가 존재하기만 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복효근, 인연
저 강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흘러간다고도 하고 하늘로 간다고도 하지만
시방 듣는 이 물소리는 무엇인가
흘러간다면
저기 아직 먹이 잡는 새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은빛 배를 뒤채는 저 물고기들은
또 어디로 흘러간 물의 노래인가
공이라 부를 건가
색이라 부를 건가
물은 거기 서서 가지 않고 흐르는데
내 마음속으로도 흐르는데
저 나무와 새와 나와는 또 어디에 흘러
있는 것인가
손택수, 이슬점
뿌연 너머로 별이 보인다
길을 가다 가끔씩 그 별을 바라본다
흐트러진 숨을 가지런히 하고
골똘하게 시선을 별에 비끄러맨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별이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아, 별이 흐르는구나
별도 나도 어딘가로 글썽이며 흘러가고 있구나
보일 듯 말 듯
그, 흐릿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멈춤, 그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흘러가던 별도 나도 잠시
서로 눈을 맞춘다
덥고 비린 살갗에
한 점 이 뭉쳐진다
이성복,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