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가을햇볕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황병승,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오후
빛바랜 차림의 한 늙은 공이
보수를 마치고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앙상한 그의 너머로
끝내 만날 수 없는 처럼 이어진 은빛 선로
그러나 언제였던가, 아득한 저 멀리로
화살표의 끝처럼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
보수를 마친 늙은 선로공이
커다란 공구를 흔들며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문태준, 은하수와 소년
푸른 수초 사이를 어린 피라미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걸 잡겠다고 소매를 걷고 손을 넣은 지 몇 핸가
가만 가만 있어라
따라 돌고 따라 흘렀으나
거기까지 가겠거니 하면 조금 더 가서 알을 슬고
알에서 갓 태어난 것은 녹을 듯 눈송이같이 눈이 맑았다
손창기, 달팽이 성자
연등 속에 달팽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제 몸피대로 커온 낡은 집을 끌고
어떻게 왔을까 사월 초파일 입적(入寂)하려고
별, 이슬과 함께 연등 속으로 들어왔던 거다
고승처럼 수염대신 마지막 남은 뿔 세우고
붙여진 이름들을 향해 복 빌어주던 마음
온 몸을 궁글리면서 층계층계
소망의 곬을 만들고 있다
몸을 한 번씩 비비꼴 때마다
비 막아주던 벽들도
촉촉한 바람이 지나가던 출입구도
둥근 원이 되어, 점점이 번져가는 연등들
이제, 두 귀만 열어두고 바람소리 들으면서
온 몸을 집안으로 들여 놓는다
보시(布施)할 때가 되었는지
순간, 스르륵 힘이 풀리더니
툭, 땅으로 공양을 드린다
껍질만 남기고 알맹이는 가져가라고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구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