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차오르는 별빛 같은 것
문덕수, 풀잎 소곡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느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네
목필균, 별
네가 날아온 만큼
나는 걸어 왔다
빛으로 날아온 너를 맞으려
억겁을 돌아 오는 길
걷고 또 걸었다
깊어 갈수록 시린 밤에
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너를 향해
지친 다리 쉴 사이 없이 걸어도
아직도 아득한 거리
막막하다고 다시 돌아가지 못할 젊음의
그 언저리에도 네가 있었다
박형준, 돼지의 속눈썹
밤늦게 돌아오는 밤에는
거울을 보고 운다
누군가 거울 속에서
부드럽게 속눈썹을 만진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자운영
지붕 위로 떠밀려온 꽃밭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돼지
흙탕물 속에서
꽃뿌리에 담긴 다리
꽃잎의 흙탕물이 밴
돼지의 속눈썹
거센 비 지나간 후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다
누구도 지붕 위에서 혼자 울고 있는
돼지에게 말을 걸지 마라
생의 널빤지를 잡고
죽은 자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아른거리는 도시의 수평선에서
간신히 귀환하는 날에는
거울 속에서
고독한 집의 강물에서
지붕을 타고 하류로 떠내려간 돼지가
울고 있는 밤이 있다
모윤숙, 기다림
천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5월 강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초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