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순, 돌아보면 모두가 그리움이다
빗방울 똑똑 떨어지는 도롱이 속에
헛김 술술 내 뿜든 세포들이
새삼 그리움으로 가물거린다
넘치는 개울에 떠내려가던 신발을 보며
두발 동동거리다
발가락이 채여 피 흘린 일
뿐이던가
소털처럼 많은 일 꿈인 듯 살아 지고
우당탕탕 천둥이 치고있다
소낙비는 내려고
곳곳에 물난리 친 뉴스를 보며
지난 그림이 그려진다
황톳물 용트림치는 강가에서
무서워 울부짖는 어린 소녀
모래밭에 뿌리내린 채송화는
어두운 밤도 낮을 삼았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바다는 붉게 타고 있는데
돌아보니 모두가 그리움이다
김구식, 그게 사랑이었나
그저 스쳐 지나던 호기심인 줄 알았지
우연히 알아낸 이름이
쇠별꽃이라든지 개망초라든지
며느리밥풀 꽃 같은
그저 그런 이름이었는데
나만이 알고 있는 그런 기분일 때 말이야
흐리다 투정 부리고
햇빛 눈부시다 눈흘기며
툭 치고 돌아서는 장난이었을 텐데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어느 날
갑자기 더 불러 보고파서
가슴만 뭉클 차 오르며
또렷이 그려지는 그 모습이
꽃망울로 부풀어오르고
꽃잎 따내듯
하나둘 기억을 따내고 나면
향기는 더 진하게 묻어나
혼절하던 이불 밑
향기만큼은 쏟아내던 그리움
그게 바로 사랑이었나
허후남, 떠나가는 사랑에게
이별이 괴로워 눈물짓지 마라
지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며
한 자리에 머무는 바람이 어딨으랴
떠나는 마음과 보내는 마음의
그 지독한 이율배반
나는 끝까지 모른 척 할란다
눈 깜박일 때마다
네가 갇혔다 달아났다 해대던
한 시절의 깨알같은 사연들은
꼭꼭 묻어 두었다가
심지 굳은 어느 날에 들춰보면 어떨까
마음 씀씀이 부족하여 가난한 날에는
떠나가는 사랑도 차마 미움이라
뿔뿔이 흩어지는 마음들일랑
한 자리에 가두어 멈추게 해놓고
마지막 당부로 쓸어안아 줄 일이다
이럭저럭 사는 동안에
가끔은 네 이름이 감당할 수 없이
마디처럼 자라 가슴에 박혀 들고
네가 없는 빈자리에 스며오는 계절마다
무심한 꽃만 피었다 질텐데
어느 곳에서든 바람으로 흔들릴
네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박수서, 인연에 관하여
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슨 자기력처럼 오른손이 끌려나갔다
왼손과 오른손의 결합, 맥을 집듯 조심스럽다
속살과 속살이 부둥켜 흔들려야 하지만
등껍질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물갈퀴질을 하듯 손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딸국질을 하는 어린 손이 흐드러지며
뚝 떨어지는 순간, 수십 수백 개의 손들이
길을 잃고 숲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서 눈물을 찔끔 흘렸을 만큼
먹이를 나르는 개미떼처럼 찾아온 손들이
그와 나를 거미줄처럼 엉켜 놓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가시처럼 따갑게 넝쿨을 쳤고
밤송이만한 꽃들이 피어났다
임보, 비
내가 저 세상에 돌아가 설 때
무엇이 제일 아름다웠더냐고 물으면
꽃이었다고 대답하리라
그 다음
무엇이 가장 황홀했느냐고 물으면
여인이었다고 대답하리라
그리고 또
무엇이 가장 소중했냐고 물으면
비라고 말하리라
오랜 가뭄으로
대지의 등짝은 부르터 갈라지고
강물도 그 내장을 다 드러내고 누울 때
산천초목들 모두 누렇게 사그라들고
금수어충(禽獸魚蟲)들 때로 쓰러져 죽어갈 때
대지를 적시는 한 줄기 비
그 생명수, 비라고 말하리라
그 비가 무어냐고 다시 물으면
당신의 손이요
당신의 소망이요
당신의 사랑이라고
그렇게 대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