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소중한 한 친구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소설형식으로 만든 글입니다. 그러니까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쯤으로 보시면 되고요. 영화 친구를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이번 글도 아마 재밌게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정말 멋진 친구와의 우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 아깝지 않게 해드릴게요.... (__) 1995년 6월 29일. 이 날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려 온 국민을 격분하게 만든 날이다. 내가 이 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와 같은 시간대에 동네 선배들에게 끌려가 못이 박힌 각목으로 죽을 듯이 맞고 피를 토해내며, 나 또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야 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이 때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고 2때였는데, 이 시절은 동네선배와 학교 선배들의 폭력과 횡포로 가득했던 시기이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한 다리 선배들은, 돈벌이를 하기위해 걸핏하면 일일락카페를 열어 동네 후배들에게 입장티켓을 팔아 올 것을 강요했고, 실적이 저조하거나 반항이라도 하는 모습이 보이면 이렇게 사람을 개 패듯이 팼던 것이다. 친구들은 선배들에게 강제적으로 받은 일락 티켓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팔아내 구타를 면할 수 있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그 당시 체대입시를 위해 공부와 운동에 집착을 해야만했던 이유로 그 티켓을 팔고 다닐 정신적 여유도 없었거니와, 나 하나 무사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제로 표를 팔기도 싫었으며, 무엇보다도 더러운 놈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터라 반항이란 놈으로 무장하여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날 내가 반병신이 됐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동네 선배들의 폭력은 멈추질 않았고 걸핏하면 말 안 듣는 다는 이유로 동네 놀이터 혹은 학교 뒷동산으로 끌고 가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을 처참하게 박살내고 깔아뭉개곤 했다. 이랬던 그 시절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피해가고 싶은 비포장도로나 다름없었지만 그 울퉁불퉁한 길을 내가 잘 참아내며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어깨를 맞대고서 내 발 한 쪽을 자신의 발등 위에 올리고 함께 걸어주는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대 입시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학교 수업이 마치면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가 운동을 함께 배우고, 또 음악을 하고 싶어 함께 피아노 학원까지 다니고, 1주일에 두 번씩 친척 이모에게 공부도 함께 배우던 한 친구. 집안사정이 안 좋아 참치와 김치로 도시락을 때워야 했던 내게 매일같이 찾아와 자신의 도시락통 뚜껑을 열면서 오늘도 계란후라이 두 개를 싸왔다며 밝게 미소짓는 그 녀석은, 항상 내 옆에서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힘이 되어주었고 용기가 되어주었다. 그런 녀석이 있었기에 내가 그 시절을 잘 참아내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친구의 우정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웃으며 보낼 수 있었던 내게, 어느 날 또 한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그 날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학교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어느 뒷골목에서 재수 없게도 악질스럽기로 소문난 동네형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김형: 컴온 베이비 나우. 더러워서 피해가는 똥보다도 더 피하고 싶은 놈. 난 그 놈에게 어쩔 수 없이 다가가야 했고, 그 놈은 주머니에서 명함크기만한 종이 수십 장을 꺼내들며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김형: 11월 말에 일일락카페 연다. 이번엔 한 명당 30장씩이야. 2만원씩 해서 11월 17일까지 다 팔아라. 한달 넘게 남았으니 다 팔 수 있지? 저번처럼 또 개기다간 비명횡사한다. 이대리: 형. 저 이제 맘잡고 공부 좀 하고 싶... 순간, 두꺼운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더니 내 뺨을 무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김형: 이 씹쌔가 그리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더 이상 입 아프게 말 안 한다. 중간 중간 검토할 테니 알아서 해라. 동네형은 그렇게 말하며 사라졌고 난 후끈거리는 볼을 어루만지며 불쾌함을 참을 수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라 평상시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 날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기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잡치게 되자 학교에서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쉬는 시간에 반 아이들과 수다콘서트를 개최하며 재밌게 놀았겠지만, 그 날은 그냥 자리를 지키며 인상만 쓰고 있어야 했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모여든 아이들든 내 기분을 무시한 채 지네 할 말만 떠들어댔다. 창수: 이대리, 너도 티켓 받았냐? 내가 먼저 이과 찜했으니 거기서 팔지 마라. 재우: 문과는 내 꺼다. 찬욱: 1학년 후배들은 내 몫! 준식: 여자들은 내가 맡았다! 녀석들도 동네 선배들을 무서워했기에 서로 페어플레이를 하자고 합의하는 듯 했다. 그런 녀석들은 쉬는 시간마다 서로 표를 팔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고 난 그저 씁쓸한 맘으로 창밖에 비치는 관악산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분 좋아야 할 날 아침부터 재수 없는 일이 터지고, 또 앞으로도 커다란 근심거리 하나를 안게 된 나는, 엿같은 기분으로 계속해서 한 숨만 푹푹, 쉬어댔다. 맘먹고 공부 좀 해보려했지만 그 날 선생님의 강의가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책을 덮고서 분을 삭히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국어선생님이 한참 칠판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순간,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수업 중에 교실 문이 열리자 모두들 그곳을 주시했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서 있는 녀석은 내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해주었다. 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백운이었다. 선생님: 수업시간에 뭐야. 운: 저.. 학생부에서 이대리 좀 불러오라는데요. 선생님: 학생부에서? 그 양반들 참 웃기네. 아니! 부르려면 쉬는 시간에 부르지 왜 남 수업하는데 부르고 그래. 이대리! 빨리 나가봐! 학생부에서 날 찾는다고?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인데 또 재수 없는 일이라도 터진 건가? 왜, 날 급하게 찾는지 이유를 몰랐지만 학생부에서, 그것도 수업시간에 날 불렀다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의미했다. 잠시나마 내 입가에 번졌던 미소는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금새 지워지고 말았고 복도로 조용히 나가 딱딱한 모습으로 서있는 운이에게 물었다. 이대리: 날, 왜 찾는데? 운: 너 또 사고 친 거 있냐? 오늘 아주 제삿날 되게 생겼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만 날 대하던 녀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난 더욱 긴장을 해야했고, 녀석을 따라 한 층 위에 있는 학생부 쪽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 앞장서서 걷던 녀석이 갑자기 자기네 반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 이대리, 이 문 열어봐. 이대리: 뭐 하는 거야. 학생부에서 찾는다며. 운: 그 전에 이 문이나 열어보라고. 이대리: 장난치지 마라. 나 지금 심각하다. 운: 아. 빨리. 녀석이 하도 보채자 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키지 않게 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자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탁 위에서 초를 불태우고 있는 아담한 사이즈의 생크림 케익과, 칠판에 하얀색 분필로 엉성하게 적힌
"생일 축하한다! 내 불알아!"란 글씨 때문이었다. 녀석의 깜짝 이벤트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운: 해피버쓰데이 투유~ 해피버쓰데이 투유~~ 이대리. 18번째 생일 무진장 축하한다. 촛농 더 떨어지기 전에 낼름 불어라. 너 좋아하는 케익 다 버리게 생겼다. 난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녀석에게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이대리: 하하. 이 자식. 간덩이 떨어질 뻔했잖아. 운: 빨리 초 불라니까. 저 봐라. 벌써 케익 한 군데 폭격 당했잖아. 기분 좋게 걸어가 바람을 크게 불어 초를 끄자 녀석이 넉살을 떨며 말했다. 운: 어떠냐? 내 이벤트가 만족스럽냐? 이래봬도 주번한테 내가 보물로 여기던 뽀뽀뽀 테이프 하나 협찬해야 했던 이벤트다! 애들한테 다 뺏기기 전에 너 좋아하는 케익 실컷 먹고 가라. 또다시 제과점 쇼윈도에서 케익 구경하다 침흘리지 말고. 그리고 참! 내년 생일 땐, 너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탕수육도 시켜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라. 알았냐? 그렇게 떠들어대고는 내 등을 가볍게 한 번 짓누르며 밝은 미소를 짓는 녀석에게, 난 더 환한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대리: 짜식. 고맙다. 운: 어떠냐? 감동 좀 받았냐? 이대리: 그래 임마. 감동의 물결이 일본열도를 침수시킬 것만 같다. 운: 임마! 적어도 미국 하와이까지는 가야지! 아! 이거 살짝 기분 나빠지려 하네. 이대리: 하하. 근데 수업 중인데 먹고가도 괜찮을까? 운: 임마. 발렌타인데이는 초코렛 먹으라 있는 날이고 빼배로데이는 빼빼로 먹으라 있는 날이지만, 해피버쓰데이는 케익 먹으라고 있는 날이야. 그런 데이를 무시하면 못 쓴 데이~! 이대리: 짜식. 특별한 날 아침부터 선배에게 맞아야 했던 일, 그리고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일일 락카페 표 때문에 오늘 하루가 우울할 뻔했는데 이 녀석이 또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대리: 선생님 의심하기 전에 빨리 내려가 봐야겠다. 케익 몇 조각을 급하게 먹고서 자리를 벗어나려하자, 녀석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운: 임마. 먹었으면 식후땡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따라와. 녀석에게 붙들려 화장실로 끌려가고야 말았다. 이대리: 우리 약속한 거 잊었냐. 학교에서 두 번 다시 담배 안 피기로. 운: 임마. 생일날엔 그 어떤 범죄도 특별사면인 거 모르냐? 자, 폐암에 그 좋다는 담배야. 걱정 말고 빨아봐. 녀석이 익살스럽게 말하며 담배 한가치를 내밀었다. 이대리: 정말 좋은 거냐? 운: 그래 임마. 그래서 난 꼬박꼬박 20개 씩 피고 자잖아. 이대리: 고맙다. 이 좋은 걸 줘서. 색햐! 환풍기 쪽으로 담배연기를 조심스럽게 내뿜는데 운이가 물었다. 운: 그 날 기억 하냐? 너랑 처음 담배 배운 날. 이대리: 당근이지. 중3 때, 시장 골목에서 눈 마주쳤다는 이유로 고3 형한테 독서실 화장실로 끌려가 죽어라 얻어터진 날 아니냐. 운: 그래. 그 개자식이 실컷 패고선 미안했는지 담배 하나씩 피라고 줬잖아. 우린 그 때, 담배 안 피면 또 맞을 것 같아 억지로 폈었고. 둘 다 콜록콜록 거리면서 말야. 하하. 이대리: 그렇게 인상쓰며 폈던 첫 담배였지만 그 맛은 잊을 수 없지. 그래서 지금 우리가 꼴초계에 입문한 거 아니냐. 운: 하긴. 그 날 얻어터지고 나오면서 바로 담배 한 갑 샀으니까 말야. 참. 담배 피기 전에 생일빵 좀 미리 때렸어야 하는데. 얻어 터지고 나서 피는 담배가 맛있으니까 말야. 어때? 생각난 김에 바로 생일빵 날려줄까? 이대리: 됐다. 안 그래도.. 아침에 벌써 맞고 왔다. 운: 뭐야! 누가 벌써 선수쳤냐? 아! 내가 첫 도장 찍으려고 했는데! 정말 아쉽네! 아쉬워! 이대리: 참나.. 별 걸 다 아쉬워 하네.. 운: 근데.. 가만 보니까 너 오늘따라 좀 어두워 보인다. 오늘 같은 날 얼굴에 먹구름 낀 이유는 뭐냐? 고민이라도 있냐? 이대리: 아주 걍! 여기다 돗자리 깔아라. 운: 역시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뭔데? 이 친구에게 낼름 속삭여봐라. 내가 일명, 고민상담원 아니냐. 이대리: 별 거 아니다. 운: 이 자식 뜸들이는 습관 여전하네. 빨리 불어 임마. 겨우 일일락카페 티켓 때문에 표정관리조차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쪽팔려 녀석에게 아무 일도 아닌 듯 숨기려했지만, 우리사이에 비밀은 없었기에 녀석에게 그 이유를 털어놓게 되었다. 이대리: 너도 일락 표 받았냐? 운: 색히. 그것 때문이었구나. 나도 받았지 뭐. 근데 사실 나도 좀 신경 쓰이긴 해. 내일 모레면 고3인데 아직까지도 이런 거나 팔고 다녀야 하니. 우리가 무슨 암표상도 아니고 말야. 근데 잠깐. 너 혹시 생일빵 맞았다는게 그 자식들.. 이대리: 짜식. 이번엔 눈치가 좀 느렸네. 돗자리 다시 걷어야겠다. 운: 공공의 젖같은 넘들! 아주 폭력을 밥먹듯이 쓰는구나! 확 그냥 시멘트로 전부 생매장 시켜버릴 수도 없고! 샹! 친구 귀빠진날 맞았다니 진짜 열받네! 이대리: 그만 흥분해라. 흥분한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니까. 운: 쓰레기 같은 놈들. 그 자식들은 수능 준비도 안 하나. 이대리: 그 핵폐기물에 처박혀도 살아날 쓰레기같은 놈들이 대학 갈 인간들로 보이냐. 그랬다간 우리 나라 대학문화 말아먹을 인간들이지. 운: 아후! 지네 집 애완용 개한테 갈기갈기 뜯겨 먹혀도 시원찮을 넘들. 그 자식들 누가 칼로 찔러주는 놈 없나? 그러면 내가 목숨걸고 그 사람 지켜줄 텐데. 씨벌.. 이대리: 아무튼. 고민이다. 고민. 이 나이 돼서 맞고 다니는 것도 쪽팔리고 안 맞으려니 내 자존심과 양심이 허락치 않고. 운: 에이씨.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겠지. 그 자식들도 내일 모레면 20대에 들어서는데 나이 처먹고도 그러겠어. 그냥 편안히 생각해. 그리고 정 부담스러우면 나한테 표 넘겨라. 내가 다 헤치울 테니. 이대리: 임마. 너 아직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뭔지 모르냐? 운: 니놈 불알크기까지 알고있는 내가 그것도 모르겠냐. 남한테 신세 지는 거. 빚지는 거. 부담 주는 거. 어디 더 해볼까? 이대리: 색히. 잘 알면서.. 운: 근데, 나는 남이 아니라 친구다. 친구. 그러니까 나한테 넘겨라. 이대리: 친구니까 더 싫다. 임마. 아참.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나 가봐야겠다. 수업 끝날 때 됐다. 운: 아, 벌써 종 칠 시간 됐네. 이대리, 가기 전에 하나만 묻자. 나 없는 너의 삶은? 이대리: 씨바. 고무줄 없는 팬티다. 됐냐? 운: 하하. 그럼 팬티 흘러내리는 게 싫으면 오늘 땡땡이 깐 거 걸릴 경우 너가 덮어써라! 나 이벤트 준비하느라 엄청 노력했으니까! 이대리: 그 놈의 개불알색히! 알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먹구름에 잔뜩 가려져 있었지만 이 녀석 때문에 난 햇빛을 가슴에 안은 것처럼 환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녀석은 내게 이런 존재였다. 비구름에 가려 구름 속에 비를 보고 있을 때, 내 가슴 곳곳에 밝은 햇살을 가득 뿌려 구름 위에 태양을 보게 하는 존재. 그런 녀석과 함께 할 때면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녀석이 사라지고 나면 내 기상도는 다시 맑음에서 흐림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그것은 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하게 접혀진 일락 티켓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레기통으로 쳐넣고 싶은 그 티켓 때문에 공부가 제대로 되질 않았고 항상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만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엄마: 요즘 맘 잡고 공부 열심히 하는 거지? 괜히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리거나 엉뚱한 거에 시간 낭비하면 안 된다. 나중에 피눈물 흘리며 후회한다. 알았지? 이대리: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기로 목표 잡았으니까 걱정 마. 나 운동하러 갈게! 바지 주머니 속에 구겨져 있던 표를 방구석에 던져두고는 츄리닝을 입고 운동을 하러 나왔다. 운이와 항상 만나기로 되어있는 프로스펙스 매장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또다시 악의 일당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도 동네에서 가장 악질로 유명한 놈들과. 김형: 튀어와 봐. 그 중 한 놈이 내게 손가락을 까딱까딱했고 난 그 놈들에게 반항하듯 걸어갔다. 그러자, 한 놈이 내 머리통을 갈겼다. 윤형: 씨바새꺄! 튀어오랬지 걸어오랬냐. 강형: 이색히 아직도 싸가지를 몸에 달고 다니네. 고물상에 아직도 안 팔았냐? 너무 싸가지 없어 안 받아주던? 김형: 다들 가만 있어봐. 너 지금까지 몇 장 팔았냐? 놈들은 또 내게 트집을 잡아 스트레스를 풀려했지만, 난 그런 놈들에게 절대 굽히지 않고 못마땅한 시선으로 떳떳하게 말했다. 이대리: 한 장도 안 팔았어요. 김형: 하하.. 한 장도 못 팔았어요라고만 대답했어도 반병신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구나. 강형: 안되겠다. 엉아들이 그 동안 너무 사랑스럽게 혼내줘서 정신을 못 차렸나본데 잠깐만 데이트 좀 하자. 이대리: 지금 운동가야 돼요. 강형: 하하. 그니까 같이 운동하러 잠깐 가자고. 확실히 몸 풀게 해줄게. 그렇게 놀이터로 끌려가고 말았다. 우리 동네에 놀이터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난 우리들이 쓰는 놀이터고 지금 내가 끌려온 곳은 이놈들의 보금자리이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반죽음 당해야 했던 악몽의 장소이기도 하다. 김형: 아깐 사람들이 좀 많아서 개겼는지도 모르겠는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몇 장 팔았냐? 내 자존심은 더러운 놈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놈들과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고 성한 몸으로 빨리 운동을 가야했기에. 이대리: 한 장도 못.. 팔았어요. 김형: 이 색히 이거 완전 병 주고 약주는 색히네. 그렇게 억지로 놈들에게 순응했지만 어김없이 주먹은 날아왔다. 얼굴에 한 대, 배에 한 대씩 맞고서 내 몸은 뒤로 날아갔다. 김형: 텨와. 강형: 뒷짐 져. 박형: 어금니 깨물어. 놈들은 주먹을 몇 번 더 날렸지만 늦게라도 순응한 것이 기특했는지 주먹질은 오래 가지 않고 멈추었다. 예전에 이곳에서 당한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강형: 거봐. 색햐.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너만 손해보잖냐. 김형: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준다. 대신 다음 번에 물었을 때도 똑같은 대사가 텨나오면 그 날은 좀 긴장하라고. 알아들었으면 그만 사라져. 등을 막 돌리려 하는데 한 놈이 내 머리를 잡고서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또다시 주먹을 날렸고, 난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푹, 쓰러져야했다. 윤형: 씨벌놈아! 목에 깁스했냐? 아니면 입에 자크 달았냐?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색햐! 선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놈들에게 한 번더 순응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고개만큼은 놈들에게로 절대 숙여지질 않았다. 차라리 몇 대 더 맞고 말지, 이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구기고 싶진 않았다. 빳빳하게 목을 세우고 있는 내게 놈들은 쌍스러운 욕과 함께 주먹을 난폭하게 휘둘렀고 난 또다시 고통을 느껴야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려주어 그들은 분을 다 풀지 못하고서 씩씩거리며 날 보내줘야만 했다. 그렇게 얻어터진 난, 분노의 한 숨을 내쉬며 프로스펙스 앞으로 걸었고, 그곳에서 시계를 내려보며 날 기다리던 운이가 내 모습을 보고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운: 짜샤! 눈빠지게 기다렸잖.. 어라? 너 얼굴 왜 그래? 누가 이렇게 고화질 모니터를 망가뜨렸어!! 이대리: 오늘 운동 글렀으니 놀이터에서 소주나 까자. 우린 2학년 애들이 쓰는 놀이터로 몸을 이동시켰고 녀석이 벤치에 앉기도 전에 급하게 물었다. 운: 너, 또 선배들한테 맞은 거냐? 이대리: 그 자식들 말고 나한테 이 짓 할 놈들 있냐? 운: 아주 후배들 까는 게 인생의 낙이 됐구나. 시벌놈들. 이대리: 우리가 지네들 씨다바리냐! 왜 허구한날 우릴 못 살게 구는 거냐! 그리고 가뜩이나 영어단어 외우는 것도 머리아파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쓰고 다녀야 하냐고! 우리 이렇게 계속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거냐? 하소연 할 곳이 그래도 운이밖에 없어 갑작스럽게 격해진 감정을 운이에게 토해냈다. 그러자 녀석은 그런 내 기분을 이해해주고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운: 그래. 너 맘 100프로 이해한다. 이해해. 나도 요즘 표 파는데 신경 쓰느라고 내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마음 같아선 다 찢어버리고 놈들한테 개기고 싶다고. 근데 억울해도 참아야지 어쩌겠냐. 그 놈들 눈밖에 낫다간 하루하루가 지옥이 될 텐데. 에잇. 1년 늦게 태어난 것도 죄나.. 이대리: 운아.. 우리 2학년 중 싸움꾼 몇 명이나 돼냐? 운: 대충 20명 정도 돼지. 그건 왜? 이대리: 그 정도면 한 번 해볼만 하겠는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운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운: 뭘? 뭐가 해볼 만 하다는 거야! 이대리: 우리.. 운: .... 이대리: 그 색히들 밀어버리자. 운: 뭐?? 이대리: 어차피 맞아죽을 거 제대로 반항 한 번 하고서 죽자 이거야. 운: 너 미쳤냐? 이대리: 세상과 타협이 안 된다면 한번쯤 미쳐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녹지 않을 눈이라면 밟아 녹이는 수밖에.. 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그래 좋아. 니 말대로 동네 선배들 밀었다 치자. 그럼 동네에서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되겠지. 근데 학교에 있는 그놈들 친구들은 어쩔 거냐. 학교에서까지 시달리고 싶냐? 이대리: 에이씨. 확 사고 치고 이사가고 싶은데 학교까지 걸려있으니... 됐다. 그럼 끝까지 맷집으로 개겨야지. 별 수 있냐. 운: 너 또 예전처럼 표 안 팔고 개기려나 본데, 너 그러다 제 명에 못 죽는다. 그냥 나한테 넘겨. 이건 부담 주는 것도 아니고 빚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아무 걱정 말고 넘겨. 빨리. 이대리: 싫다. 운: 이 자식이 맨 날 황소만 잡아먹고 다니나. 어떻게 된 게 고집이 꺽이질 않냐. 정 그렇게 나올 거면 더럽고 치사해도 그냥 눈 딱 감고 참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말야. 이대리: 그래 너 말대로 눈 딱 감고 그냥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팔면 다 팔 순 있어. 근데! 나 그 자식들 행복하게 해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놈들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다른 애들을 피해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운: 피해라니. 티켓 사는 애들도 좋아서 가는 건데. 이대리: 물론 좋아서 가는 애들도 있겠지. 근데 그런 애들은 우리가 팔아야 할 티켓의 5분의 1정도 밖에 안 돼. 그러니까 대부분이 협박 또는 폭력에 못 이겨 집에다 거짓말하고서 겨우겨우 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거지. 나, 그런 식으로 놈들과 똑같은 등급의 인간이 되는 거 싫다. 운: 휴~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난 더 이상 너 그렇게 맞고 다니는 모습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내 말 들어줘라. 알았지? 이대리: 미안하다. 일제시대 때 쪽바리놈들의 앞잡이 마냥,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피해주는 짓은 정말 하기 싫다. 운: 이대리. 너 내 친구 맞지? 이번이 정말 마지막 일 테니 이런 저런 일 따지지 말고 딱 한 번만 그 자식들 비위 맞춰주자. 그니까 힘들게 오르막길을 택하지 말고 편하게 내리막길을 택하자는 거야. 이대리: .. 운: 친구가 부탁한다. 그 날 녀석은 내게 간절히 부탁을 했고 그렇게 날 걱정해주는 친구의 목소리는 이후로도 내 귓가에 자꾸만 울려퍼졌다. 녀석이 내게 그렇게 간절히 부탁을 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친구의 부탁을 내 고집으로 무시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친구 말대로 딱 한 번만 자존심, 양심같은 걸 버리고 그 더러운 자식들을 위해 봉사해보자고 맘먹었다. 비록 내 맘은 다른 길을 향하고 있었지만 친구가 제시하는 길로 한 번 정도 들어서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진 난, 며칠 뒤 교탁에 서서 밥을 먹고 있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대리: 너희들, 쭉쭉빵빵 잘 빠진 여자들이랑 술마시고 춤추며 같이 놀고싶지? 그리고 스트레스도 맘껏 풀고 싶지? 얼마 뒤에, 일일 락카페가 열릴 거야. 2만원만 내면 아무 간섭없이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야. 우리에겐 큰 돈일지도 모르지만 1주일 정도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참으면 모을 수 있는 돈이기도 해. 모두들 어때? 반 아이들: ....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하는 나처럼, 이를 조용히 쳐다보던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별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친구의 부탁이라 한 번쯤 시도는 해보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고있자니 더 이상 내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이대리: 다들 가기 싫어하는 눈치구나. 그래. 가지 마라. 그런데 가서 좋을 거 하나도 없지. 괜히 밥 먹는 시간 뺏어 미안하다. 그렇게 조용히 마지막 말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한 맘은 들었지만 내키지 않는 짓을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난 다시, 내 주관대로 밀고 나가기로 맘을 고쳐먹었다. 놈들에게 맞아서 식물인간이 되는 일이 있어도 내 의지를 꺽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며. 그 후로, 시계바늘의 시침이 얼마나 돌았을까. 이번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들이 나를 매점 앞으로 불러냈고 몇마디 대화도 하지 않은 채, 매점 옆 탁구장으로 날 끌고갔다. 장선배: 그러니까 지금 다른 놈들은 거의 다 팔아가는데 넌 한 장도 못 팔았다는 거냐? 아니, 한 장도 안 팔았다는 거냐? 이거 학교에선 웬만하면 안 건드리려 했드만 완전 악질이네. 그 정체 불명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응?? 임선배: 이 색히는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놈이야. 개색햐. 눈 닫아. 내 눈이 감기는 순간, 몸 곳곳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주먹에 맞고 몸이 구부려지자, 놈들은 날 마구 짓밟으며 고레고레 악을 써댔다. 임선배: 씨바알님아! 우리 땐, 다른 학교까지 가서 표 팔고 와도 맘에 안 찬다며 선배들한테 몰매 맞고 그랬는데 뭐? 못 판 것도 아니고 안 팔았다고? 개샹! 아주 피터져 뒤져봐라! 사람의 급소인 명치를 강하게 맞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내게 놈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팔과 발을 날렸다. 놈들의 주먹과 발길질로 인해 볼이 찢겨지고 코피가 터지면서 내 두 주먹에 힘이 가득 실렸지만, 몇 번씩이나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참아내야 했다. 차마 선배에게 주먹을 날릴 수도 없었고, 내가 택한 길에 대한 업보이니 스스로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순간, 실내와 실외의 분위기는 너무나 달랐다. 안에서는 한 명이 피가 터져라 맞고 있고, 밖에서는 매점 앞에 모인 남, 여학생들이 낄낄낄 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엊어터지며 잠깐씩 스쳐보이는 창가에는 실내와 실외 분위기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한 남학생이 보였다. 그 녀석은 까만 유리창을 통해 이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두 주먹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잠깐씩 보인 모습이었지만 그 녀석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친구 운이었다. 녀석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얼마나 지났을까. 탁구장 유리창이 쨍그랑, 깨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난 그 유리창이 왜 깨졌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선배들은 갑작스럽게 탁구장 안으로 깨져 들어온 유리파편에 놀라 폭력을 멈추었고, 매점에 있던 학생들은 이 소리에 놀라 일제히 탁구장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사태가 묘하게 돌아가자, 날 때리던 선배들은 뒷문으로 해서 탁구실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이렇게 한 녀석의 소행으로 악몽같은 상황은 막을 내리게 것이다. 구석에 찌그리고 앉아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3학년 여학생 중 한 명이 탁구장으로 들어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주: 어멋! 이대리.. 어떻게 된 거야.. 이대리: 허어.. 아무 일도 아냐. 영주가 놀라고 있자, 다른 여학생들도 손에 먹을 것을 가득 든 채,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냈다. 내 초라한 모습이 이렇게 여학생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자, 난 그들의 걱정과 호의를 무시하며 탁구장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나와서 교실로 가기 위해 힘겹게 매점 계단을 오르는데, 저 멀리 벤치에 앉아있는 운이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춰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자, 벤치에 돌맹이 몇개를 쌓아두고서 어디론가 힘없이 던지고 있는 행동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나오는 녀석의 행동이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런 말을 내뱉기에는 지금 내 모습이 너무나 우스광스럽고 녀석의 심기또한 그런 말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녀석의 모습에서 시선을 때고는 씁쓸한 맘으로 멈추었던 걸음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순간 크게 울려대는 돌맹이소리와 녀석의 짧은 외침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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