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미, 그대라는 우물하나 있습니다
그대라는 우물하나 있어
두레박으로 그대 맘을 긷습니다
때론 내 서툰 솜씨 땜에 길어 올리던
그대 맘에 티끌을 넣곤 합니다
우물 안 돌 틈으로 난
풀잎이 떨어져 올라오기도 하고
두레박 가득 채워진 물이 흘러넘치기도 합니다
그건 모두가 내 탓 이겠지요
사람의 맘을 얻는 다는 것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맑은 물이 샘솟는 우물
들여다보면 하늘이 들어있고
내 얼굴도 들어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한량없는 그대 맘
청아한 하늘빛으로 그대를 얻는 건 내 몫입니다
오늘도
두레박 하나로 맘을 긷습니다
그대의 맘을 긷습니다
노혜경, 행복한 산책
한밤중 숲으로 난 작은 길을
난 걸어갔네
내 뼈에서
살점들이 잎사귀처럼
지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르지
아직도 뛰는 심장소리 들리지만
난 한없이 걸어 여기
너무, 너무 와 버렸으므로
펄럭이는 넝마, 덜거덕거리는
오래된 절간의 목어처럼
걸려 버렸으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았네
그저 한없이 걸었다는 기억
기억 속의, 수많은 발자국과 그림자들
찬란히 빛나는 검은 뼈
어둔 밤 숲속 길을
밝히는 오래 묵은 인광
그랬었네
아마 전생의 산책이었는지도 모르지
길이 끝난 것 같은 곳에서
난 내게 전화를 건다
이젠 길이 끝난 것 같다고
펄럭이지 말고
후두둑
무너지라고
박완호, 아버지
아버지 내내 말이 없네
몇 년 만에 다녀온 종친회
무슨 설움 깊었는지
무거운 듯 내리 덮은 눈꺼풀 옴짝달싹 않고
담배만 거푸 피우시네
해마다 여름이면 깊어 가는 병
이십 년이 지나도록 떨구지 못하고
상처처럼 새겨둔 아내 얼굴 탓일까
그토록 좋아하는 술 한 모금 못 마신 탓일까
제 심연에 갇힌 채
날개 꺾인 새처럼 돌아눕는
그의 마른 어깨가
한겨울 논바닥의 볏단 마냥 쓸쓸하다
온몸의 털을 다 뽑아가도 아파하지 않을
손주 녀석 장난해도 아랑곳없는
침묵 안
낙엽 같은 상처 속으로
누구도 가 닿지 못하네
신재한, 가끔은 그리움 속으로
가끔은
그 어떤 그리움의 화폭에
쓸쓸한 사랑이 느껴지던
삶의 그림을 그려도 볼 일이다
한 방울
눈물로 황혼을 머금은 물감
팔 벌려 닿을 수 없는 노을에 퍼지고
날개 달고 달아난 아픈 영혼이
초라한 모닥불을 피우며
아련한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살아가는 것이 어찌 이별뿐이겠는가
가끔은
회색 물감 채색한 거리가
창문 틈 사이로 어두워지면
잔잔한 가슴 열어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도 볼 일이다
이재무, 겨울나무로 서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다
여름날 생의 자랑이었던
가지의 꽃들아 잎들아
잠시 안녕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을 위해
지금은 작별을 해야 할 때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분분한 낙엽
철을 앞세워 오는 서리 앞에서
뼈 울고 살은 떨려 오지만
겨울을 겨울답게 껴안기 위해
잎들아, 사랑의 이름으로
지난 안일과 나태의 너를 떨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