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방청소를 하다 문득 전여자친구 물건을 담아놓은 박스를 열어봤습니다
그네가 저희 집에서 입던 레깅스, 양말, 담요 같은 게 있었습니다
제가 끼던 커플링도 있고 같이 가서 그네가 만든 도자기잔도 있었습니다
뭔가 이제는 정리를 할 때라고 생각됐습니다
일 년 가까이 제 방에,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박스를, 치워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곧바로 옥상에 나가 불을 붙였습니다
이상하게 한참을 타더군요...
다 탈 때까지 지켜보고 들어가려는데 불은 안 꺼지고 뒤에서 햇살은 미친듯이 내리쬐고...
참다참다 옆얼굴에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할 때 들어왔습니다
한 15분은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오래 타는지...
마치 제 마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탈 것도 없는데 자꾸만 타오르는 불꽃이, 이제 사귈 여지가 없는데 헛된 망상을 하는 제 미련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 지켜보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에 들어와 태울 수 없는 도자기잔이나 그네가 만들어준 커플팔찌 같은 것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그 동안 왜 내버려두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헤어진 직후에는 그네의 집에 보내주려고 했었는데 그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불태우거나 버리는 건 잔인한 짓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은 아무 것도 아닌 物에 저 혼자 감정이입을 한 것이지요
드라마 정도전을 다시 보고 있는데 정도전이 돌탑 쌓는 처녀에게 그러더군요
"그저 돌멩이일 뿐이다!"
이제 그것들은 저에게 단순한 물건이 되었고, 그래서 태워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네와 언제 헤어졌나 일기를 들추어봤습니다
1년 하고도 사흘이 지났더군요
1년 동안 저는 무엇을 했나 생각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끊임없다시피 연애를 했던 저지만 지난 1년간 여자를 사귀지 않았습니다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 동안 일기를 보니 열심히 취미생활하고 중간에 교통사고로 입원도 한 번 하고 그랬더군요
어떻게든 시간은 흐르나 봅니다
아직도 아무 미련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꺼지지 않을 것처럼 지겹게 타오르던 불꽃도 언젠가는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까요
이것이 남은 미련을 지워가는 하나의 큰 걸음이었다고 생각하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불이나 지르고, 먹먹한 가슴으로 글을 남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