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발바닥으로 읽다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이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이근배, 풀밭에서
만나는 것마다
헤어지는 것마다
노래 아닌 것이 없다
버려진 들에 무심코 피어난
풀잎 한 오리도
내 한 생애만큼이나 뜨거운
목숨의 가락
만나면 아는 눈빛의
아는 슬픔의 여울이 되는
아, 아 헤어지는 시간
그 뒤에 남는 모습임에랴
박광록, 들풀
바람이 불려면 불라지요
비가 오려면 오라지요
천둥이 치려면 치라지요
저 흑빛 겨울죽음 속에서도
내 기어이 살아났거늘
그까짓 외로움쯤이야
그러나
길가에 밟히는 이름 없는 들풀이라고
수군거리지는 마시오
내 이래 뵈도
가난으로 이골난 서러운 세월일랑
거북처럼 등에 지고
분연히 여기까지 걸어왔느니
비록
화려한 꽃은 못되더라도
이렇듯
어렵사리 씨 맺음 다 하였으니
이제는 낙엽이 진들, 스러진들
아쉬울 게 또 무엇이랴
성공한 인생이 별것이드냐
아! 나는 들풀이려오
그리움 먹고사는
들풀이려오
윤은경, 꽃의 무게
가는 비여
내 마음은 너무 자주 갇힌다
진창 지나 가파른 바윗길 더듬어
여기까지 따라온 터진 얼굴
터진
손끝도 버릴 것
그러나 무릇 무엇인가를 버리려는 자는
꼭 그만한 무게를 가슴에 쌓는 것이다
너무 이른 봄, 마른 나뭇가지에서
지난 해의 잎사귀가 팔랑 떨어진다
악착같이 희망을 움키던 약한 손아귀여
차라리, 무릎꺾고 목 드리우니
아직 칼날같은 날씨를 탓하며
못가의 배롱나무 천천히 늙어가고
하아 조것이!
발돋움하며 반짝 불 켜드는 동백 한 송이
누구 혹 이 꽃의 무게를 아시는지
강재현, 바람이 전하는 안부
그대를 사랑한다 말하기엔
빈 몸이 너무 가벼워
차마 다 전하지 못하고
빈 들녘에 바람으로 나부꼈습니다
그대를 그리워한다 말하기엔
지친 어깨가 너무 무거워
차마 다 전하지 못하고
하늘빛 바다에 파도로 일렁였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그대의 그림자를 안고 바람처럼, 파도처럼
더 멀리도, 더 가까이도 가지 못하는 거리
그 모진 거리를 수인처럼 걷고 있습니다
미처 전하지 못한 가슴 속 언어들을
세월 지나, 그대 바람결에 들으신다면
그 땐, 눈물 없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소서
이 절실한 바람의 언어를 깨워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