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표를 사러 들어가는데, 20대 중반의 여성분 하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울상인 표정으로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라며 쥐죽은 듯 말을 걸어대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모른체 하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나 역시 속으로 ‘나한테는 다가오지 말기’를 바라며 그 여성분이 다른 사람에게 붙기를 바랬다. 그런데 시선을 나에게 맞춘 여성분은 ‘차비가 없어서...’라면서 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그냥 끄덕이고 지나쳤다. 내가 외면했던 이유는 신종 앵벌이 수법으로 ‘집에 가려는데 차비가 없다.’며 돈 받아 챙기는 수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고 나자 그 여성분이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서의 부끄러워 하면서도 난처해 하던 표정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앵벌이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엄마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서’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매표소로 데리고 가서 만 몇천원 짜리 차표를 끊어줬다.
그 순간 갑자기 예전에 ‘뒤통수 맞았던 사건’이 떠 오른다. 십 몇 년 전에 어떤 소도시에서 아주머니가 ‘차비가 없다.’고 해서 매표소에 데려가 차표를 끊어 줬더니 나중에 그걸 다시 환불해서 바꿔 갔던 것이다. 당시 매표소 직원은 그 아주머니를 잘 아는 이유로 나를 쳐다보며 눈짓을 하며 고개를 좌우로 혼들어 댔었는데, 나는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 오르자, 나는 차표를 끊어 주면서 그 여성분에게 “돈으로 바꿔 가면 안돼요.”라고 한마디 했고, 매표소 직원에게는 “돈으로 바꿔 달라고 해도 바꿔주지 마세요”라고 한마디 했다. 하여간 그 여성분은 채증이 해소 된 듯, 얼마 전 까지의 울상을 펴고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며 게이트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내가 큰 실례를 했던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과거에 호의를 베풀었다가 뒤통수 맞는 경험이 있었다 선 치더라도 그때의 사건과 이 날의 사건은 독립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걸 연결해서 같은류의 사건으로 규정해서 그 여성분을 ‘앵벌이 취급’을 했던 것이다. 이는 큰 실례였다. 어떻게 보면 안하니 못한 일을 했던 것이다. 내 호의는 사실은 호의가 아닌 악의에 가까운 것이 된 것이었다. 그분을 다시 만난다면 사과 드리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 여성분과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기에 허탈함이 더하다. 이 때문에 당시 울상인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던 그 여성분의 표정이 그 사건 이후로 종종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계속 느껴진다.
사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겪는 ‘경험’은 우리의 자아를 좀 더 넓혀진 세상으로 확장하는 자극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간의 ‘습관과 익숙한 인지구조’는 오히려 그 ‘경험’을 반대로 우리의 편협한 자아에 수렴해 들어가게 만드는 강력한 자력을 만들어 내는 듯 하다. 쉽게 말해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미숙해 지고 아집만 공고해 진다는 말이다.
이렇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 내 주체적 자율성의 허울에 스스로가 빠져 있지 않는지 하는 반성이 늘 필요한 것이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 현실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참여하는 노력이... 사실은 내 조잡한 아집을 합리화 하려는 수작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현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너를 있게 한 모든 것이 너의 발목을 잡는다.’고. 그러고 보면 어쩌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듯 하다.
물론! 그 자아의 함정을 벗어나는 길이 있기는 하다. 지극히 단순한 방법이다.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는 것. ‘무상무아’의 삶. 하지만 그러려면 실로 모든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산으로 올라가야 할 터이니(물론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말은 쉽지만 실현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지금 이 순간 ‘극단의 아집’과 ‘무상무아’ 그 사이의 어디선가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