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승희, 그리움은 바다로 길을 낸다
빈방에서 나 홀로 그림자와 이야기하다
옛 친구들 그리우면 바다로 간다
냇가에 뛰어놀던 벌거숭이 웃음
물결따라 자맥질을 하고 있네
온종일 울어도 눈물 흘리지 않는 바람과
홀로 먹이를 찾는 갈매기는 이야기하네
'파도는 부서져도 멍들지 않고 멀리서
희망의 출발을 하고 있다'고
거기
떨어진 별이 살아 숨쉬는 곳에
검정 고무신에 고래를 키우며
맨발로 웃고 선 어린 내가 섬이 되었네
정선이, 병호, 기순이가 햇미역처럼 누워 흔들리고 있네
정선아 병호야 기순아 모두 모두 안녕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바다로 갔네
나도 지금 이야기 따라 바다로 간다
향일화, 항아리의 속 깊은 정
산다는 일이 때론
내몰아치지 못해 정드는 일처럼
애끓은 시간만큼
내 품에서 경이로운 맛들 때까지
목숨 거는 사랑이기에
넣어주는 대로 품은 일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지요
아무 생각 없이 사랑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반란인지를
맘 삶아대는 고통으로
속 끓이다 끓이다
떫은 시간 다 바꾼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한 거지요
그러니 그대여
내 품에서 살다간 정을
가볍게 퍼주지 마오
양현주, 가난한 날의 오후
외로운 사람은
한쪽 가슴이 찢어져서 기우뚱하다
창문 틈으로
볕이 부르면 들풀이라도 되어
잎 돌돌 말려
점. 점. 점
타들어가
언덕에 뿌리 채 눕고 싶었다
길을 걷는 동안
가장 가깝게 있고도
먼 풍경이 된 나무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파리 틈, 사이사이로
태양이 침엽수에 찔려 우수수 쏟아진다
흔들리며 피는 송화(松花)
땅에 닿지 못한 꽃가루가
빈 하늘에 샛노란 편지를 쓴다
고영민, 물목
봄날, 청둥오리들이
물 홑청을 펼쳐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다
잔잔히 펼쳐놓은 원단을
자맥질하여
일정한 땀수로 꼼꼼히 바느질 하고 있다
겨우내 덮고 있던 너희들의 낡고 큰 이불
제법 큰놈은 한번에 두땀, 석 땀씩
꿰매고 있다
꼼꼼하여
바늘땀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헐겁던 수면이
팽팽하다
윤석주, 첫 마음
조용한 숲에 가만히 손 넣은 어느 봄날
반항도 없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직 햇빛 한 번 들지 않는
그 수풀 사랑스럽고 한편 가여워
디밀었던 손 슬며시 거두었던 그 마음
처음 본 그녀에게 마음 뺏겨
내 한평생 사는 것이 홍역이었을까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잊고 싶었지만
낙엽 지는 밤 더운 커피 생각나듯
한잔 술에 마음보다 가슴이 먼저 기억하는
시간 가고 세월 흘러도
차마, 누구에겐가 말하지 못할
나 죽어
하관할 때 같이 묻혀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