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 장마
발가락 열 개가 떠나네
모퉁이에 남겨진 발자국 선명하네
그가 뛰어다녔을
구름 아래 세상은
헤어짐과 만남의 연속
기-인 반복의 거리
이른 아침
장마가 시작된다는 기상예보
덩그러니 남은 내 발등 위로
비는 내리네
내 발가락 사이로
오직 하나로 모이는 빗방울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면 하네
잠시 갠 하늘 아래
코스모스는 어제보다 푸르고
남기고 간 발자국
망각처럼 지워지고
신경림,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 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어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태천, 부고(訃告)
대문과 문설주 사이에
봉투 하나 매달려 있다
소식도 전해줄 친구도 없는데
누가 소인도 우표도 없이
이 저녁나절에 편지를 보냈을까
반으로 접힌 노란 봉투 위에
이름 석자 적혀 있다
아직은 햇볕이 따가운데
멀리서 온 바람이 차갑게
내 등을 쓰다듬고
나는 말없이 호박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저녁나절 내내
집 앞의 어둠을
호박꽃이 밝혀주었다
고재종, 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넌분분 춤추었겟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트린다
유응교, 그대가 걸어온 길이
그대가 걸어온 길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비뚤어진 걸음을
바로 잡을 일이다
구두 뒤축을 갈아 끼우듯이
그대가 비바람을 헤치며
고난을 이겨왔다 하더라도
때로는 꺾여진 희망하나
바로 잡을 일이다
바람에 휘어진 살대를 고치듯이
그대가 살아온 삶의 상처가
아무리 깊고 깊더라도
때로는 흔적 없이 말끔하게
바로 잡을 일이다
찢겨진 가방을 손질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