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희망폭포
이대로 당신 앞에 서서 죽으리
당신의 사리(舍利)로 밥을 해먹고
당신의 눈물로 술을 마신 뒤
희망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었다가
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하고 나서
이대로 서서 죽어 바다로 가리
서정춘,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정숙, 느티나무
옛 어머니들은 거의
당신 가슴에
사리
몇 알 품고 사셨지
청도 운문사 입구
속 다 비우고 비워 맨 살로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는
해묵은 나무
바람에 열린 치맛자락 맡기고 서 있는
실루엣 뒤로 반짝이는 저
보석, 살아있는
사리탑
우리들에게 속 파서 먹이고 점점
빈 껍질이 되어 가시던
어머니
천양희, 벌새가 사는 법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고영민, 밥그릇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