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 그대는 내게
그대는 내게
풍덩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슬픔 하나
그대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여
품안에서도 꺼질 것 같은
기쁨 하나
소리나지 않는 아픔
알큰한 향기에 목이 메이는
그대는 내게
기쁨 하나 슬픔 하나
김광균, 언덕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네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 별이 하나 둘 늘어 갈 때면
우리들은 나발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 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가에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최은숙, 가을 조치원역
산국이 핀 비탈에선
첫사랑의 냄새가 난다
들열매와 오솔길 반달
그것처럼 호젓한 말 첫사랑은
그냥 첫사랑
쌉싸름한 향기의 레일을 밟고
노란 꽃무더기를 흔들며
바람같은 기차가 간다
버린 시간을 업고 낡아가는 선로여
말없이 등을 내주는 이여
남겨진 생에선
따스한 목덜미의 냄새가 난다
이생진, 바다에서
내가 점점 커지더니
하늘이 되더라
내가 점점 작아지더니
물이 되더라
내가 내 몸에 물을 끼얹더니
선녀가 되더라
내가 옷을 벗더니
넓어지더라
송수권,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메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아름답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