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저 작은 잎 하나에
거센 바람에도
요지부동이던 나
저 잎 하나로
온통 흔들릴 줄이야
구멍 난
작은 잎 하나에
가슴 베어 붉어진 상처로
눈물 글썽 일줄 몰랐네
저 낙엽
한 잎 지는걸 보다
천길 벼랑에 매달릴 줄
미처 나는 알지 못했네
김승해, 달의 발등을 씻다
오래 비워둔 아궁이에 불을 들인다
첫 별을 띄우듯 서둘러 불을 지피면
무쇠 솥 맹물만 설설 끓는 저녁 어스름
개미귀신의 명주 날개 같은 것이
어디 숨었다 나왔는지
살품을 파고들듯
내려서는 달의 흰 발등
오래 전 정읍의 한 여자
이슬받이로 섰던 그 밤처럼
달은 높이곰 돋아 보름밤
내려선 달의 흰 발등을 씻어보면
우물자리 하나 깊이 패인다
남은 것은
맨발의 감촉 뿐
먼 길 오실 당신이 저 달빛 보시면
얕게 건널 수 있는 강에도 다 젖어 버리겠네
박라연, 물의 얼굴
하얀 물에게도 상처는 있지
가만가만 흐르고 싶지
초록의 벼숲으로 흘러가서
8월의 가슴 그 뙤약볕 사이를 하얗게
하얗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 두루미
한 줄기 서늘한 빗방울이 되고 싶지
이은림, 피안(彼岸)
저 집들, 언제 강을 건너
저렇게 무덤처럼 웅크리고 앉았나
아무도 몰래 건너가버린 저 산들은
어떻게 다시 또 데려오나
젖은 길만 골라 가는 낡은 나룻배가
산과
나무들과 꽃들
풀밭을 다 실어 나른 건가
남아 있던 불빛마저 참방참방 뛰어서
저편으로 가는구나
환하다
내가 없는 저곳
이성목, 뜨거운 뿌리
식당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풀어 넣는다
솥바닥의 푸른 김이 천장까지 확 끼친다
양파는 가늘고 긴 뿌리를 뽑아 내린다
유리잔에 양파의 입김이 뿌옇게 서려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국수가닥을 건져 올리던 한 노년이
희뿌연 안경을 벗어놓고 잠시
자신의 가늘고 긴 숨을 끊어 뜨거운 국물 속에 내려놓는다
나이 어린 손자는 후루룩 후루룩 그 뜨거운 소리를 먹는다
땀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세상의 모든, 푸른 것을 밀어 올리는 뿌리는
이렇듯 뜨거운 바닥에 맨발로 서는 것이다
그렇지. 이제 필생의 뿌리를 나도 내려야겠다
당신과 함께
칼국수를 먹는 속이 훅 달아오른다
뜨거움이 온 몸에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