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고요하게 손을 뻗다
담장에 넝쿨 하나
고요하게 손을 뻗어
담장을 만진다
새 잎 하나 온다
담장은 제 몸에
새 생명 하나가 고요하게
손을 뻗는 것 모른다
이 지구에서 많은 종이
새로 생겨날 때도
혹은 사라져갈 때도
그 어머니인 지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마무것도 모르는 어머니
그런 존재인 어머니
고요하게 손을 뻗는 새끼들을 그냥 모른 체하세요
허형만, 허리를 구부린다
여든 여섯 해 동안
턱 한번 꼿꼿이 세운 법 없이
평생을 호미질만 하시던
어머니 허리가
오늘은 절반으로 꺾이셨다
함께 손잡고 걷는 아들
허리를 구부리고 우러러 뵌다
환갑이 되어서야 구부러지는 허리
그렇구나 구부릴 수만 있다면
구부릴 수 있는 데까지 구부리겠다
온몸을 말아서 공처럼 둥글어지겟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영혼의 문 앞에 당도할 수만 있다면
정호승, 칼날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김선주, 줄
아직 눈뜨지 않은 어린 다람쥐
엄마 잃은 너를 만났다
두유와 알밤을 적당히 먹여
눈이 뜨이던 때
너는 사람을 어버이로 알았다
사람과 다람쥐의 경계가 허물어져
아이들과 함께 눕고 일어나는 다람쥐
어느날 네 줄무늬를 보았다
아하
세상의 모든 줄은
경계를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길이었다
이제인, 홍시
그래도
마음만은 두고 가셨군요
발 헛디딜까
내 가는 길목마다 따라와
가난한 등불 하나
걸어 두셨군요
터질 듯 농익은 저 붉은 기억들
죽어서도 나를 설레게 할
그 목소리
앞으로 남은 날들
이젠 길 잃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