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묵언(默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조병화, 탄광촌
석탄 먼지
청요릿집
검은 절벽 아래서 요길 한다
문경 새재는
구름에 있고
구름 아래 이곳, 사택촌
아해들이 줄을 넘는다
점촌행 버스와
서울행 버스가, 서로
노상서 소식 전한다
박재삼, 황홀
미류나무들이 햇빛 속에서
제일 빛나는 일만 끊임없이 하고 있네
옛날에도 불었던 한정 없는 바람에
온갖 것을 맡기고
몸을 이리저리 팔랑팔랑 뒤집어 가며
마치 나비와도 같이, 그러면서
선 자세로 하고 있으나
우리의 앉은 것보다 더 편해 보이네
거기에는 슬픔이라곤 하나 없고
오직 기쁨만이
넘쳐나는 것을 보네
우리의 몇 천리나 닦은 긴 수심도
실려 얹어 보라고 하네
어디서부터 그것을
풀어야 하는지 얼떨떨하게
벌써 나는 쉰 두 해를 헛되이 보냈네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복효근, 꽃 아닌 것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