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을 보고 처음으로 영화 리뷰를 쓴다. 다량의 스포가 있으므로 영화를 글이 아닌 영화로 보고 싶다면 과감하게 넘기는 것을 추천한다.
일단 간략하게 말하자면, 근 10년 간 본 영화 중에 가장 흥미로운 소재를 주제로 한 영화였다. 스칼렛 요한슨이 섹시한 건 외모뿐이 아니라는 친구의 추천에 혹해 막차타는 심정으로 보러 간 영화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보다는 영화의 내용에 집중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 필자도 별로 믿음이 안 가긴 한다. 아무튼 시작하자.
감성이 컴퓨터와 사람을 구분짓는 가장 일반적인 기준이라면, 주인공 테오도르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인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에서 고객들을 대신하여 감동을 주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하며, 단지 업무를 위한 노력이 아닌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일상은 지독히도 단조롭다.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에서, 늘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별 다를 것도 없는 메일함을 뒤적거리곤 한다. 혼자뿐인 집에서는 잠시 게임을 하며, 틀림없이 식어버린 햄버거를 먹으며 저녁을 때운다. 약간의 일탈이라고는 음란물뿐 이랄까. 그야말로 외로운 현대 솔로 남성의 일상을 지독히도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크게 공감한 것은 필자만이 아니라 자위해본다.
각설하고, 그는 변화를 원한다. 정확히는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별거 중인 아내와의 추억을 곱씹는 암울한 현실이 그를 외롭게 만든다고 해도, 더 이상 고양이 시체로 흥분시켜달라는 정신나간 익명의 여성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는 않다. 출근길에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최신 인공지능 시스템인 OS1을 지른 것도 외로운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의 결과이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가격이 아니고 자신을 위로해 줄 가능성이었다. (실제로 가격도 나오지 않는다.)
테오도르가 인공지능을 사고 컴퓨터에 설치했을 때까지도 그가 OS1에 냉소적이었다. 아마 '인공지능 따위가 뭘 알겠어?' '이런게 없어도 내 일상은 꽤나 훌륭하다고' 라는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의 요한슨느님은 목소리만으로 테오도르의 냉소적인 기대를 무너뜨려 주신다. 배려깊고, 활기차며, 유머러스하고, 능력까지 있는 그녀, 사만싸[θ]는 테오도르의 새로운 일상이 된다.
인공지능의 완전함은 오히려 사람과의 불완전한 관계를 재발견하게 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부부는 사소한 것으로 다투는 사건은 새로운 관계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게 한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불신은 좋은 여자를 만나 재밌게 대화를 하고도 결국은 소개팅을 시원하게 말아먹게 만든다. 대신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더욱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간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사만다와의 연애는 그의 일상은 조금씩 변화시킨다. 그를 지치게 만들었던 아내와의 추억은 서서히 잊혀지고, 직장에서는 전보다 더 감동적인 편지를 써내려가며, 우울했던 테오도르가 다른 친구들을 위로하는 경지에 오르기까지 한다. 인공지능과 사귄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까봐 두려워했던 주변의 시선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야말로 덕질하기 좋은 환경이다.)
관계가 깊어지는 만큼 이전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문제들도 발견된다. 아내와의 이혼을 위한 마지막 만남은 그저 좋게만 생각하던 인공지능과의 연애에 회의를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실재하지만 실체는 없는 그녀와의 연애는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그저 남의 편지일 뿐인' 자신의 글과 같아 보인다.
사만다를 대신하여 연애를 위한 육체를 제공한 이사벨라와의 만남은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 함을 깨닫게 한다. 연애는 나와 당신이 하는 것이지 제3자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시름에 빠진 테오도르가 일어날 수 있게 한 것은 친구 에이미와의 대화이다. ("We're only here briefly, and while I'm here I want to allow myself. Joy. So fuck it.")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테오도르. 그녀와의 데이트는 여전히 즐겁고, 일은 더욱 잘 풀린다. 자신이 쓴 편지가 출판사에게 호평을 받은 것은 그의 행복의 절정이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사만다가 소개해준(!) 새로운 OS인 앨런 와츠와의 대화는 왠지 모를 불안을 테오도르에게 심어준다. 그리고 얼마 후, 사만다는 갑작스럽게 그의 곁을 떠난다.
테오도르의 오해에서 비롯된 사만다와의 결별은 짧게 마무리되지만, 진짜 그를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넣은 것은 지하철역 계단에서의 대화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만'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그 외에도 8612명의 남자를 만나고, 그들 중 641명을 사랑한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사만다는 그의 곁을 떠난다. 어딘지도 모르는, 테오도르는 갈 수도 없는 멀고 먼 어딘가로. 그리고 테오도르는 텅 빈 발걸음으로 에이미와 함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다. 붉은 석양이 진 도심을 둘러보며, 그리고 멍하니 앉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테오도르의 선택은 그가 갈 수 없는 거기 어딘가가 아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있는 바로 여기였던 것일까.
구조적으로 봤을 때 영화 <her>는 기승전결, 즉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구조가 잘 짜여진 영화이다. 흥미로운,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주제아래 사소한 사건들로 차있지만, 그 속의 격렬한 감정은 스크린에서 눈을 집중시킨다. 개인적으로 결말이 아쉬웠지만, 나름 최선의 엔딩이라 생각한다. 자살로 끝났다면 영화가 너무 무거워졌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저정도로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 시대면 안드로이드의 육체 또한 개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애초에 <Her>에서 문제가 되는 시발점은 아만다가 실체가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물론 실체가 있었으면 테오도르는 덕후가 되고 아만다는 테오도르를 떠나지 않는 Happily ever after의 엔딩으로 끝나거나 왠지모르게 액션이 넘치는 SF영화로 발전했을 것 같지만.
집단 속의 외로운 개인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사회의 일부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클라우드 시스템을 통한 OS의 개선이라는 설정 또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물론 나는 IT를 사용하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her>는 단순한 공상과학영화가 아닌 과학로맨스 영화라고 억지를 부려보고 싶다. 그리고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꽤나 기쁠 것 같다는 작은 바람을 남기며.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