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littlebirddiary.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wRup6iF2Cww
이경임, 지독한 허기
둥근 달을 보면 슬퍼진다
저만큼 둥글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둠들을 베어먹었을까
그믐달을 보면 슬퍼진다
저만큼 여위도록
얼마나 사나운 어둠들에게 물어뜯겼을까
문창갑, 벌목장 풍경
둥우리에 찔끔찔끔 눈물 흘려 놓고
새들이 길 떠나는 그곳
숲은 해체되고 있더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더라
비바람도 눈보라도 아닌 겨우
전기톱질 몇 번에 쿵쿵 비명 지르며
너무 쉽게 한 생애를 마감하고 있는
나무들의 임종
사람이나 나무나 뿌리만 깊고 튼튼하면
거칠 것 없다는 생각 하나
땅에 묻고 돌아서니 몇 마리의 새들 또
길 떠나고 있더라
이기철, 말
오늘도 나는 산새만큼 많은 말을 써버렸다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물소리만큼 많은 목청을 놓쳐버렸다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씻고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며 본
너무 많은 꽃을 매단 아카시아나무의 아랫도리가 허전해 보인다
그 아래, 땅 가까이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한 나팔꽃이 묵묵히 울타리를 기어 올라간다
말하지 않는 것들의 붉고 푸른 고요
상처를 이기려면 더 아파야 한다
허전해서 바라보니 내가 놓친 말들이, 꽃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못이 되어 내게로 날아온다
아, 나는 내일도 산새만큼 많은 말을 놓칠 것이다
누가 나더러 텅 빈 메아리같이 말을 놓치는 시간을 만들어놓았나
맹문재, 라면을 한 개 더 삶다
아이들이 밥맛 없다고 라면을 끓여달라기에
세 명분으로 두 개를 삶다가
얼른 한 개를 더 넣는다
라면 국물에 뜨는 기름이 몸에 좋지 않다고
개수를 줄이며 살아왔는데
나를 지탱하는 힘으로 삼던 라면 국물 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4명의 자식들 점심으로 8개의 라면을 삶은 어머니
양이 많아야 한 입이라도 더 먹을 수 있기에
물을 많이 넣고 퍼지도록 끓였다
나는 전태일 어머니의 그 라면을 생각하며 젊은 날을 버텼다
자취방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라면에 찬밥 먹는 대접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라면을 잘 먹지 않는다
감기에 걸리면 보름을 넘기기 일쑤고
욕할 때조차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몸, 휘하려고 한다지만
라면을 먹지 않을 정도로 겁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버리려고 했던 라면 맛
한식날 심은 나무처럼 살려야 한다고 아이들 앞에서
나는 오기를 부린 것이다
문성해, 냄비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 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