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운(運)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디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도종환, 겨울 일요일
진눈깨비가 별빛을 끄을고 내려와 무너진다
반짝이던 모든 것들도 땅으로 사붓사붓 내리고
하늘은 더욱 어두웠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눈이라 가르친다
술이 취한 채 성당엘 나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용서하라 용서하라고 진눈깨비가 내린다
이 땅에 내려 아주 짧은 동안 빛깔을 간직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들을 바라본다
창 밖으로 구울며 용서하라 용서하라고 바람도 밤을 새운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함동선, 형님은 언제나 서른 네 살
쌀가마니 탄약상자 부상병이 탄 달구지를 보고
놀란 까치들이
흰 배를 드러내며 날아간다
후퇴하는 인민군 총뿌리에 떠밀리며
서낭당에 절하고 또 절하던 형님은
그 후에 다신 돌아오질 못했다
오늘도 낮달은 머리 위에서 뒹굴고 있지만
빛을 먹은 필름처럼 까맣게 탄 사진을 현상해서
천도재 올린 우리 식구들
절이 멀어질수록 풀벌레 소리로 귀를 막는다
나무껍질처럼 투박해진 세월은
내 얼굴의 돌팔매질을 해
물수제비 예닐곱 개나 뜨던 여름이 오면
형님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6.25를 기억하는 예성강처럼
언제나 거기에 있다
천양희, 노선(路線)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화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