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고비의 고비
고비에서는 고비를 넘어야 한다
뼈를 넘고 돌을 넘고 모래를 넘고
고개 드는 두려움을 넘어야 한다
고비에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땅의 고요 하늘의 고요 지평선의 고요를 넘고
텅 빈 말대가리가 내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고비에는 해골이 많다
그것은 방황하던 업덩어리들의 잔해
고비에서는 없는 길을 넘어야 하고
있는 길을 의심해야 한다
사막에서 펼치는 지도란
때로 모래가 흐르는 텅 빈 종이에 불과하다
길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나기철, 당나귀
나날이 귀가 자란다
귀가 자랄수록 거리에서 들었던
자음들은 모음들을 만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와 내 몸 속에서 떠돈다
시끄러운 소리들 때문에
풍경조차 모자를 눌러쓴다
귓속에 든 소리들이 쥐를 낳는다
쥐는 지푸라기를 모으고
지푸라기는 길을 낸다
커지는 귀를 움켜쥐려
모자를 눌러쓰다보면
넓은 대로도 귀 안에 갇힌다
쥐똥과 지푸라기들로 난장판이 된
귀에서 낯선 세상은 자꾸 태어나고
수다는 길게 이어진다
길상호, 껍질의 본능
사과 껍질을, 배의 껍질을 벗기면서
그들 삶의 나사를 풀어놓는 중이라고
나는 기계적인 생각을 돌린 적 있다
속과 겉의 경계를 예리한 칼로 갈라
껍질과 알맹이를 나누려던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몇 점씩 달라붙던 과일의 살점들
한참 후 쟁반 위 벗겨놓은 껍질을 보니
불어있는 살점을 중심에 두고
돌돌 자신을 말아가고 있다 알맹이였던
그녀의 빈 자리 끌어안고 잠든 사내처럼
버려지고도 제 본능을 감당하고 있다
이미 씨앗은 제 속을 떠났지만
과일 빛깔은 살갗에 선명하게 남았다고
그 빛깔 향기로 다 날릴 때까지
안간힘 다하고 있는 껍질들
너무 쉽게 변색되어 갈라지던 마음을
저 껍질로 멍석말이해 놓고
흠씬 두드려 패고 나면 다시 싱싱해질까
말려진 껍질 속에 드러눕고 싶었다
김충규, 우체국 계단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조은, 몸을 굽힐수록
상처 속에는 미련의 씨방이 있다
외면하면 씨앗이 요람까지 튄다
세상을 부싯돌처럼 치고 다니던 몸에
어둠의 더께가 앉는다
반환점은 없다
몸을 굽힐수록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등에 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