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미 마을에서 - 丹齋 申采浩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 도종환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 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 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12~14행은 丹齋 선생의 漢詩 家兄忌日에서 인용.
* 동력골 : 고두미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 눈녹이물 : ‘눈석임물’의 북한어.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흐르는 물.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에는 독립 운동가, 역사학자, 사회주의 혁명가, 무정부주의자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