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i-my-na-mind.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t_0mo89Rkl8
고재종, 시린 생
살얼음 친 고래실 미나리꽝에
청둥오리 때의 붉은 발들이 내린다
그 발자국마다 살얼음 헤치는
새파란 미나리 줄기를 본다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그 미나리를 건지는 여인이 있다
난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
청둥오리의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
정대구, 등뼈로 져나른 약속
어제로 추수도 다 끝냈겠다
햇볕을 실어 몇만 길인가
볏섬을 져나르던 내 넓은 등판
뼛속까지 쬐어서 스며서
달큰한 내음
동치미 국물 마시며 풀어내야지
고드름 매달리는 겨울 저녁
우리들의 깊은 사연
엮어내야지
푸른 하늘 저 하늘이 변치 않듯
등뼈로 져나른 약속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할 거야
신기섭, 안녕
두 노인이 서로 마주 보고 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록 입술을 봉오리처럼 봉긋 다문 채
손가락을 움직여 나누는 대화지만
손가락이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지만 어떤가
저 담 너머 플라다너스 빈 가지들 또한
두 노인의 앙상한 손가락같이 쌩쌩- 휘날린다
눈 털어 날린다
노인들 곁을 지나는
여자의 등에 업힌 아이가 자꾸만
눈을 깜빡이며 뒤돌아본다 붉어진다
이 뻣뻣한 웅성거림 속에서
저 노인들은 고요하다
부드럽다
향기롭다
대화를 접은 손가락으로
눈을 씻으며, 그러나 한 노인만이
가르랑대는 버스에 오른다
남은 노인도 매한가지 눈을 씻으며
눈을 씻는
손가락 끝의 반짝임이 아, 속삭인다
(안녕)
김복연, 나는 뜨거워진다
취나물 삶는 냄새 골짝 가득 번진다
깊은 산중에도 저녁은 허기로 오고
산도 중도 되지 못한 늙은 남자
빈방을 내어준다
세상 작파한 마음
겨우 산중턱에 걸려
아궁이 불 지피는 저녁을 세 놓다니
언제 내 생도 저렇듯 꽉 차거나
텅 빌까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
고봉으로 뜬 저녁밥 차려지고
나는 한 그릇 밥 앞에서 뜨거워진다
최문자, 닿고 싶은 곳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