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동백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최두석, 엄나무
가시투성이로 태어났으나
가시를 떨구면서 늠름해진다
가시로 세상에 맞서는 일이
부질없다는 걸 깨우친 까닭이다
정겨운 시골마을의
정자나무가 되고 싶은 시인이여
네가 온몸에 달고 있다가
떨군 가시는 무려 몇 가마인가
이생진, 바다에 오는 이유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 점의 가구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강재현, 사람이 그립다
이유없이 사람이
그리운 날이 있다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 있는 날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마음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몸만 살아 움직인 날은 진짜 사람이 그립다
가슴 속 뒤주에 꼭곡 숨겨두었던
속내 깊은 이야기 밤새 풀어놓고
마음이 후련해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세월가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눈물로 쏟아내면
채에 걸러 맑은 물로
내 가슴에 돌려 줄
뿌리 깊은 내 나무
아, 이젠
나 역시 누구의 눈물을 걸러 줄
그리운 사람이고 싶다
박정만, 어떤 흐린 날
내 마음의 어느 모래밭에
꽃잎처럼 찍혀진 발자욱 하나
사랑의 잔물결 마냥 꽃무동서니
날 저물고 비 내리면 어찌하나
꿈은
오지 않을 길처럼 사라지고
사랑은
금단의 열매처럼 멀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