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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ate fall, I left New York City for Seoul, intending to visit for just a few days. Then, on Oct. 24, a small South Korean cable network called JTBC revealed that its reporters had discovered a tablet that had belonged to Choi Soon-sil, the hidden power behind President Park Geun-hye. The data on the device exposed a web of unprecedented corruption. In response, millions of people took to the streets, waving candles in protest, until Dec. 9, when South Korea’s parliament voted to impeach Park.
지난 늦가을 나는 며칠 동안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다. 그런데 10월 24일 한국의 작은 케이블 방송인 JTBC가 박근혜 대통령 뒤에 숨은 권력자 최순실이 소유했던 태블릿을 기자들이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기에 담겨있던 내용은 전례 없는 일련의 부패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수백만의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국회에 박 대통령 탄핵 표결이 있던 12월 9일까지 촛불시위를 벌였다.
I stayed on to watch the “45-day candlelight revolution” and joined the protests as the crowd, each week, increased massively. I was born and raised in Seoul under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Park Chung-hee, the current president’s father. In some ways, I felt as though I had stepped straight into my own past. Yet, in contrast to the violent protests during the first Park era, the crowds now were eerily peaceful as though Koreans themselves had changed with time.
나는 “45일간의 촛불 혁명”을 지켜보기 위해 머물렀고 매주 대규모로 시위 인원이 증가하는 시위에 직접 참여했다. 나는 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군부 독재 시절에 한국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내 과거 속으로 다시 곧자로 돌아간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격렬했던 시위와는 대조적으로, 지금의 군중들은 마치 한국인들 스스로 시대에 따라 변화한 듯 불가사의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Some things, however, had changed with time. There was, for instance, the country’s vigorous independent media, which lit the fuse of public anger to begin with. One of the triggers for public outrage was what Koreans call the “missing seven hours,” which refers to the mystery of Park’s whereabouts during the sinking of the Sewol ferry, a national disaster that left Koreans weeping and furious. The loaded phrases — “candlelight miracle” and “seven hours’ secret” — powerfully captured the people’s dissatisfaction with the establishment, but they were also coined and perpetuated by a handful of independent journalists.
그러나 어떤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예를 들어서 애초에 군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한국의 활발한 독립 미디어가 있었다. 국민들을 격분시켰던 것 중의 하나는 “사라진 7시간”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한국인에게 슬픔과 분노를 주었던 국가적 재난 세월호 침몰 당시 박근혜의 행방에 관한 미스터리를 가리킨다. 준비된 문구들 – “촛불의 기적”과 “7시간의 비밀” 등의 함축적인 말들은 기득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족을 강력히 표현해주며 이들은 소수의 독립 언론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길이 남게 되었다.
Having just come from the United States, where a credulous media had been manipulated by the winning presidential candidate rather than holding him to account, I was particularly sensitive to the resilient and creative role played by South Korean reporters.
책임을 묻기보다는 승리하는 대선 후보에 의해 조작당하는 순진한 언론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온 나에게는 한국 기자들이 가진 끈기있고 창의적인 역할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The vast influence of South Korea’s independent media is a belated product of dismal failures by the country’s establishment media. For instance, there have long been three main television stations in South Korea: MBC, KBS, and SBS. But after the 2007 election to the presidency of the conservative Lee Myung-bak, the heads of the news stations were replaced by people with an explicitly pro-government stance, essentially turning the press into a propaganda machine. In 2010, thousands of journalists went on strike in response, many of whom were members of the “386 Generation,” a term for those born in the 1960s who went to college during the 1980s dictatorship and student riots. Some of the strikers eventually resigned while others were transferred to lesser divisions where they would not be able to report. It was also around this time that the government took a hand in setting up brand-new cable stations, called jongpyun, linked to the existing establishment newspapers, which were mostly in favor of the ruling Saenuri Party.
한국 독립언론의 막대한 영향력은 한국의 기존언론의 형편없는 실패가 낳은 뒤늦은 산물이다. 예를 들면, 한국에는 오래된 MBC, KBS, SBS 등 3개의 주요 TV 방송국이 있어왔다. 그러나 2007년 보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후 보도국 수장들이 친정부 성향을 지닌 인사들로 교체되며 사실상 언론은 선전도구로 전락되었다. 이에 맞서 2010년 수천 명의 언론인들이 파업을 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독재와 학생 운동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 “386세대”들이었다. 결국 일부 파업 참가자들은 사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보도를 할 수 없는 한직으로 전출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종편이라 불리는 새로운 케이불 방송국들을 만드는 일에 관여한 것도 이무렵의 일로서 이들은 집권 새누리당에 호의적이던 기존의 신문사들과 연계되어 있었다.
It has recently been impossible to avoid political polarization in establishment South Korean media. In January 2015, when I visited Seoul on a book tour for my undercover investigation in North Korea, I was shunned by all the left-leaning newspapers and the one pro-left cable network, which are pro-North Korea and do not readily acknowledge the human rights issues there, even as they claim to resist the oppression of Koreans in their own country. I was embraced instead by the South Korean pro-government media and jongpyun determined to antagonize North Korea. Inside this polarized framework, I had bizarrely been turned into the equivalent of a poster girl for Fox News.
최근 기존 한국 언론에서 정치적 양극화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5년 1월 내가 북한에서의 비밀 조사에 관한 책의 북투어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좌파 성향의 신문과 좌파 케이블 방송매체는 스스로 친북 성향이고 북한의 인권문제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한에서 시민에 대한 억압을 견디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나를 피했다. 대신 나는 북한을 적대시하는 한국의 친정부 언론과 종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양극화된 구조에서 나는 우습게도 마치 폭스뉴스(역주: 미국의 극우 매체)를 홍보하는 듯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During the Sewol disaster, however, energized independent journalists finally managed to break the partisan establishment media’s monopoly on the public’s attention. What on the surface appeared to be just an unfortunate accident struck at the emotional core of South Koreans in the same way the 9/11 attacks did for Americans because it revealed a pervasive rottenness under the surface of the country’s political system. It was later revealed that the sinking and the lack of rescue efforts were linked to federal-level corruption involving the ferry owners, the insurance company, the Korean coast guard, and the Korean navy.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며, 활발한 독립언론인들이 마침내 편파적인 기존 언론이 대중의 관심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독점 관계를 깨트렸다. 표면상으로 하나의 불행한 사건에 지나지 않은 듯 했지만 9/11 공격이 미국인들에게 그랬듯이 이 사건은 정치적 시스템의 표면 아래에 만연한 부패를 드러내며 한국인들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을 강타했다. 후에 세월호 침몰과 구조 노력의 부재는 세월호 선주들, 보험사들, 한국해양경찰 및 한국 해군이 연루된 국가적 차원의 부패와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South Korea is one of the most digitally connected nations in the world. The horror was witnessed live online by the entire nation, and those trapped teenagers were texting and video chatting their parents until their final seconds. In those desperate hours, however, Park was nowhere to be found, and no statement was issued by the Blue House until the president finally appeared in public, seven hours after the accident happened, looking dazed and clueless as she asked, “Why is it so hard to find the students if they are wearing life jackets?” Everyone had drowned hours ago.
한국은 전세계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가장 잘 연결된 국가이다. 세월호 참사의 공포는 전국에서 온라인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고 세월호에 갇힌 10대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부모들과 문자와 영상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적인 순간에 박 대통령은 그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참사가 발생한 지 7시간이 지나서야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면 왜 학생들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어렵죠?”라고 물으며 처음으로 대중 앞에 대통령이 모습을 보일 때까지 청와대는 아무런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미 몇 시간 전에 익사한 뒤였다.
On the ground, the reporting from the mainstream news outlets seemed oddly haphazard. They first announced that all passengers had been safely rescued, which they then had to retract; then they reported on the “world’s biggest rescue operation” by the coast guard, which turned out not to be true. Yet on site were a few independent journalists who told an entirely different story.
현장에서 주류 언론매체들의 보도는 이상할 정도로 무성의해 보였다. 그들은 처음에 모든 승객들이 안전하게 구조되었다고 보도했다가 이어서 이를 철회해야 했다. 그 다음 그들은 해양경찰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구조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보도했던 몇몇 독립 언론인들이 있었다.
Among them was Lee Sang-ho, a former investigative reporter for MBC TV, who had become a household name for the 2005 “Samsung X-file” report in which he exposed the secret wiretaps that revealed Samsung’s bribery around the 1997 presidential election. Born in 1968, Lee, a member of the 386 Generation, spent his college years protesting against the then-dictatorship of Chun Doo-hwan. Under the new pro-government leadership at MBC, he was transferred to cover entertainment, assigned to a nonreporting desk, and eventually sent abroad to the United States on a “reporting sabbatical.” It was upon returning to Seoul, in 2011, that he set up his own internet TV news platform, which would become Gobal News, funded by private subscriptions.
그들 중 한 명이 이상호 전 MBC TV 탐사보도기자로서 그는 2005년 “삼성 X-파일” 보도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 보도에서 이상호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삼성이 뇌물을 주었음을 밝히는 비밀 녹취록을 폭로했다. 1968년에 태어난 386세대인 이 기자는 대학시절 내내 당시 전두환 독재에 맞서 싸웠다. MBC의 새로운 친정부 지도 체제 하에서 그는 연예부 담당으로 옮겨지고, 비보도직 업무에 배정되었다가 결국 “보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는 개인 회비로 기금을 댄 인터넷 TV 뉴스(후에 고발뉴스)를 시작했다.
When the Sewol ferry sank, Lee was one of the first reporters to arrive at the scene and was the last one to leave, more than a month later. As the mainstream media reported that there was a massive rescue team of hundreds of helicopters and ships, Lee reported that there were just two voluntary divers at the scene. A video clip of Lee, at a meeting of victims’ families, shouting at the other reporters for publishing lies and then breaking down in tears went viral.
세월호가 침몰 했을 때 이 기자는 그 현장에 도착한 첫 기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한 달이 넘도록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았다. 주류 언론은 수백 대의 헬리콥터와 선박을 갖춘 대규모 구조팀이 있다고 보도했을 때 이 기자는 단 두 명의 자원봉사 잠수부들만이 현장에 있다고 보도했다. 희생자 가족 회의에서, 거짓 보도를 한 다른 기자들에게 고함을 지르다 눈물을 흘리는 이상호 기자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영상이 급속히 퍼졌다.
Also at the scene was a team of investigative reporters from Newstapa, an internet TV network formed in 2012 by a group of 30 journalists who had been fired from mainstream media outlets. Because they focus on video journalism, everything was laid bare visually, and people saw with their own eyes what was happening — or not happening — with the Sewol rescue work.
또한 현장에는 주류 언론에서 해고된 30명의 언론인들이 2012년 만든 인터넷 TV네트워크 뉴스타파 탐사보도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상보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졌고 사람들은 세월호 구조 작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무슨 일이 행해지지 않는지를 자신들 눈으로 직접 보았다.
The addictive real-time reporting of the Sewol disaster demonstrated the potential power of independent journalism. Now such journalists are increasingly turning to documentary reporting to engage their audience in an age where films can be made using just a phone. Lee has used this medium expertly. His first film, Diving Bell, about the Sewol tragedy was first released in theaters, then aired on YouTube, and then finally on TV on the eve of the parliament hearing on the Sewol ferry’s sinking. He will soon release a film called The President’s Seven Hours; he was the first to report the claim that during the seven-hour disappearance, Park was under anesthetic in the Blue House, getting a face-lifting, Botox-related injection treatment.
세월호 참사에 대한 중독성 있는 실시간 보도는 독립 언론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스마트폰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수 있는 시대에 저널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다큐멘터리 보도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기자는 이런 매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의 첫번째 영화 “다이빙벨”은 극장에 먼저 개봉된 후, 유튜브에 공개되었고 마침내 세월호 국정감사 전날에 TV를 통해 방영되었다. 그는 곧 차기작 “대통령의 7시간”을 공개할 예정이며 또한 박 대통령이 사라진 7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보톡스와 유사한 주름을 펴주는 성형수술을 받으며 마취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을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
Another renegade reporter is 44-year-old Joo Jinu, who, with his long, sweeping hair and lean profile, exudes the coolness of a K-pop star. In 2006, after the publisher of Sisa Journal, the country’s leading political weekly, responded to pressure from Samsung to remove a negative article by not only complying with the request but also firing the top editors who disagreed, Joo was one of 22 journalists to quit and form a spinoff magazine,Sisa-in. Joo was given the nickname “Satan’s reporter” for exposing corruption at the Yoido Full Gospel Church, which has the world’s biggest Pentecostal congregation, as well as breaking open Lee Myung-bak’s financial corruption, including the infamous BBK scandal that nearly cost him the presidency.
또다른 반항아적 기자는 흘러내린 긴머리에 마른 체형을 가져 K-pop 스타의 느낌을 자아내는 44세의 주진우 씨이다. 그는 2006년에 한국의 대표 정치주간지 시사저널의 발행인이 부정적인 기사를 삭제해 달라는 삼성의 압력에 굴복하고 기사를 삭제했을 뿐 아니라 반발하는 고위 편집자들을 해고했을 당시 함께 사표를 내고 나와 시사인이라는 잡지를 만든 22명의 기자들 중 한 명이다. 주 기자는 세계 최대의 오순절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부패를 보도했을 뿐 어니라 이명박의 대통령직을 위태롭게 했던 악명높은 BBK 스캔들을 포함한 대통령의 금융 부패를 보도해 “악마기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Today, Joo regularly tours with his sellout Talk Concert, which often features left-leaning celebrities, and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short-lived but immensely popular political podcast Naggomsu (an abbreviation for “I Am a Petty Minded Creep”), whose influence among Korea’s young people was equivalent to that of The Daily Show in its heyday under Jon Stewart, though the podcast was shut down under a federal investigation as Park Geun-hye took office. Joo has been investigating the corruption surrounding Choi Soon-sil and Park since 2007.
오늘날 주 기자는 좌파 유명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인기리에 토크콘서트를 열고 있으며, 짧은 기간 방송했지만 대단한 인기를 끈 팟캐스트 나꼼수(“나는 꼼수다”의 줄임말)의 진행자 4명 중 한 명이었다. 이 방송은 박근혜가 정권을 잡은 후 정부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을 때까지 존 스튜어트의 Daily Show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와 같은 정도로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주 기자는 2007년부터 최순실과 박 대통령에 관한 부패를 조사해오고 있기도 하다.
Among the generally pro-government jongpyun, JTBC TV stands out as the only left-leaning network. The station, which first broke the tablet story and amplified information originated by Joo and Lee, has dominated ratings during the scandal. Since the Sewol tragedy, when it was seen as the only reliable voice among the cable networks, it has also played a critical role in invigorating Korean media.
대체적으로 친정부적인 종편들 가운데, JTBC는 유일하게 좌파성향의 방송국으로 눈에 띈다. JTBC는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최초로 보도했고 주진우와 이상호 기자의 기사를 확대보도하면서 부패스캔들 보도에서 최고의 시청율을 올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방송국은 케이블TV들 중에 유일하게 신뢰를 받고 있으며, 한국 언론에 활력을 불어 넣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The reason for its political independence has much to do with the powerful figure of Son Suk-hee, a beloved, seasoned anchor who came from MBC TV to head its operation and host its nightly news.
JTBC가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많은 사랑을 받는 노련한 앵커 손석희가 있기 때문인데, 그는 MBC에서 옮겨와 JTBC를 총괄하며 저녁 뉴스를 진행한다.
This 45-day candlelight revolution, and the journalism that fueled it, was a backlash against the government’s record of controlling the media and the public. It helped, of course, that the people of South Korea are highly literate and that the country is so wired. One of the key pieces of evidence, for example, was tracked down on the internet by a private citizen and sent via text to a parliament member during the hearing probing Park and Choi, which then had a decisive result in the impeachment vote the following day.
이러한 45일간의 촛불시위와 이를 불붙게 한 언론 보도는 언론과 대중을 통제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물론 한국사람들이 학력이 높고, 인터넷 사용율이 높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한 시민은 인터넷에서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 국회의원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다음날 대통령 탄핵안이 압도적인 투표로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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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course, just as it is always a few bad seeds among politicians who end up taking their country onto a devastating path, it was only a handful of standout journalists who made a difference. But there’s reason to think that others will soon follow their successful example — and hopefully not only in South Korea.
물론, 정치인들 중에 한두 나쁜 종자들이 한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처럼, 변화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들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도 이런 성공적인 예를 따를 것이라고 여겨지며,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기를 바란다.
출처 | https://thenewspro.org/?p=24016 |